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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May 22. 2018

놓쳐서는 안 되는 "때"

- 여행에 관하여

여행(旅行, travel)은 휴양(休養, rest)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바쁨을 잠시 비우고 충분히 먹고, 잘 자고, 재미있는 볼거리를 간단히 즐기는 것이 휴양이다. 살면서 모두에게 꼭 필요한 쉬는 시간이다. 많은 돈을 들여 최고급 호텔에서 누리는 휴양도 있을 것이고 최소의 경비로 산림욕이나 뜨거운 반신욕을 즐기는 찜질방에서의 쉼도 휴양이다.

그러나 내게 여행은 다른 의미다. 일상의 멈춤과 충전의 의미는 동일할 지라도 과정과 귀결은 다르다. 20대와 30대 중반까지 나는 여행자의 삶을 제법 잘 살았던 것 같다.

방학 내 모았던 아르바이트 비용과 성적우수 장학금(한 학기에 30만 원씩)을 모아 떠난 유럽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 중국, 동남아, 이후 미국 유학시절까지 포함하여 많은 낯선 땅을 밟아보았다. 가끔은 새벽에 터미널로 뛰어가서 동해 바다에 해 뜨는 것을 보며 혼자 소주잔을 기울였고, 2박 3일 동안 혼자 지리산 자락에서 입술이 마르도록 뛰어다녔다. 나의 여행은 대부분 혼자였다. 충동과 우연이 씨줄 날줄로 이어주는 깨닫음의 여정은 혼자일 때여야 민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모든 여행을 마친 건 돌이켜보면 내게 수호신이 있었던 게 맞다 싶다.)

이탈리아 역 앞의 포장마차 같던 피자가게, 교토 금각사의 향불 냄새, 몽고 초원의 미친 별들, 티베트 라싸 포탈라 궁의 버터향, 운강 석굴 앞의 인력거, 중국 태산의 일출, 실크로드 위의 먼지바람, 그랜드 캐니언의 석양, 홍콩 야시장의 소시지 빛깔, 싱가포르 카페의 아이스크림.

모든 것에 “때”가 있다. 
밀물의 때, 썰물의 때… 나는 청춘의 “때”를 누릴 수 있는 복을 가졌을 뿐이라 여긴다. 많은 연애를 했고 여러 사랑을 했고,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결과적으로 내 청춘의 모든 순간이 여행이었던 것이다.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게 여행 가방 짐 싸는 일이라고 말하는 남자와 사는 지금, 내 두 다리는 온통 집과 인근 지역에 머물러 있다. 이건 진심인데, 이것이 서운하거나 아쉽거나 섭섭한 적,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미 난 충분한 추억과 충만한 기억과 온전한 경험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때”를 맞추어 누렸을 때, 만족이 결과된다. 시절을 맞춘 과일이 맛난 이유와 같을까 싶다. 제철 음식의 싱싱함을 아는 이라면 그 외의 계절에서 굳이 그 음식을 먹지 않듯이 말이다. 

무릇 때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때를 충분히, 제대로, 누려야만 한다는 것. 여기에는 안타깝게도 타고난 운명이나 운이나 복 같은 것이 작용되는 일이겠지만, 정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나는 내가 애정 하는 후배들과 어린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누려라, 거침없이” 

지금 사랑해야 할 때라면, 두려움 없는 사랑을 해야 맞다. 지금 여행해야 할 때라면, 거침없는 여정을 뛰어가야 맞다. 거친 여행이 아니라 모든 것에  '멈춤(pause)' 버튼을 눌러야 하는 휴양의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맞다. 이제 정착하여 어린아이를 돌보고 남편과 아내를 보살필 때라면 단단히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켜야 옳다.

뜨거워진 엔진을 식히기 위해 멈춘 실크로드 위, 40도를 넘는 기온에도 땀구멍에서 올라오는 습기조차 바로 증발해버리는 그 사막에 서 있는 20대의 나. 그리고 오늘도 종일 엄마로서 아내로서 편집자로서 번역자로서 적절히 채운 하루를
 마무리하는 지금의 나. 이 둘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인 적이 없다. 

부디, 오늘 “때”를 놓치지 말기를… 당신, 미친 듯이 때를 누리시기를.





https://youtu.be/-yfybUD4a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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