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땅을 가득 비추는 어느 날
한 남자가 낡은 코트를 여미며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곳은 보통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은밀한 장소
비밀스러운 그곳을 남자는 비장한 표정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세상에 한 곳 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법의 공간으로
끼릭-
"어서 오세요."
문을 여니 야리야리한 체격의 한 남자가 짧게 고개를 숙이며 남자를 맞이했다.
옅은 콧수염과 짙은 눈썹에서 제법 연륜이 묻어나온다.
"여기가 감정 거래소인가요?"
"네. 잘 찾아오셨습니다."
가게는 낡은 나무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벽과 천장에는 굵은 줄기가 많았으며 연갈색의 바닥에서는 약간의 흙냄새까지 났다.
역시나 오래된 곳인가...
"안녕하세요."
"그래요. 어느 감정이 필요하셔서 오셨는지?"
"아니요. 사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팔고 싶은 감정이 있어서요."
남자의 말을 들은 주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어떤 감정이요?"
그리고 남자는 말했다.
"외로움이요. 제 외로움을 사주세요."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 탓인지
주인은 그의 말에 꽤 놀란 표정이다.
그렇다.
여기는 감정을 사고팔 수 있는 곳
하지만 누구든 쉽게 찾을 수 없는 곳
.
외로움이라..
감정을 거래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본연의 감정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감정은 인위적일 수 없다.
하지만 톱니바퀴 같은 지금의 사회 속에 우리는 썩은 감정을 가슴에 묻고 살고 있다.
그것은 토해내지도, 삼켜내지도 못하는 것이라 여기 이 감정 거래소에서
새로운 감정을 사 자신의 검은 마음에 덧칠을 한다.
아주 비밀스럽게 말이다.
"외로움을 파시면 여파가 꽤 클 텐데요."
"괜찮습니다. 가능한가요?"
"가능은 하다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외로움을 느끼기 싫습니다 더 이상."
"그렇지만 그건 사랑으로 덮으면 되지 않습니까?'
주인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얘기했다.
감정은 살 수 있음에 파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파는 것은 본연의 감정이라 다시 되돌릴 수가 없다.
즉, 외로움을 팔면 앞으로 이 남자에겐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없어지게 된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이렇게 담담히 얘기하다니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사랑이 필요 없습니다."
"짧은 생각으로 결정한 거면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주세요.
감정 거래는 그렇게 쉬운 게 아니랍니다. 사는 건 문제 되지 않지만 파는 건 감정을 잃는 거랑 다름없어요.
다시 되돌릴 수도 없고 그걸 메울 감정도 살 수 없답니다."
"괜찮습니다. 이미 고민은 수백 번 했으니깐요."
주인은 옅게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서 아주 진한 슬픔을 보았다.
툭, 하고 건드리면 눈물을 흘릴 거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어떤 상처를 가졌기에 이렇게 외로움을 쉽게 팔려고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주인이 찬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무슨..?"
"곧장 당신의 감정을 살 수 있다만 당신이 겪은 일들을 듣고 싶군요."
"특별 한 건 없습니다. 평범해요 아주."
"그러니 얘기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술 좋아하시나요?
괜찮은 위스키가 있는데.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주인의 말에 남자는 뒷목을 매만지며 의자에 앉았다.
주인은 찬장에서 보랏빛 위스키와 두개의 잔을 들고 테이블에 놓았다.
강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먼저 한 잔해요.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니."
두 남자는 가볍게 잔을 맞추고 위스키를 목으로 넘겼다.
그것이 마법의 시작
남자는 무섭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이제 그의 시간은 과거로 흘러간다.
.
남자가 눈을 떴을 땐 주인은 찬장에 위스키를 넣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여긴 방금 자신이 들어온 감정 거래소였다.
"아.."
"놀라지 마세요. 그저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했을 뿐이니깐요."
주인이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실로 여유가 넘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목덜미에서 진득한 땀이 세어나오는 게 느껴진다.
남자는 옷가지를 펄럭이며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오래된 나무가 많은 탓인지 가게 안은 진한 습기로 가득 차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난 내 이야기를 이 사람에게 다 말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 어쩔 셈이지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홀로 생각했다.
"이제 감정을 내놓을 순서네요. 마음의 준비는 되셨나요?"
주인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주인은 투명한 유리로 된 상자를 열고 이내 작은 식물의 뿌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로 걸어간다.
"여긴 참 축축한 곳이에요. 온통 나무로 돼있는데 다들 물을 먹고 있죠.
그 이유는 여기 온 사람들이 쏟아낸 감정들을 이 나무들이 다 들이마신 탓입니다.
자, 당신의 나무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저 방에서 마음껏 뿜어내세요 그만큼 이 나무는 커질 테니깐요."
주인은 남자에게 뿌리를 내밀었고 남자는 그 뿌리를 받은 채
주인이 가리키는 감정의 방으로 향한다.
끼릭-
문이 열리니 울창한 숲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주인이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잘 오셨어요."
남자는 그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왠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감정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의 뿌리는 이제 저 숲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주인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하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은 오늘도 무언갈 해내었다는 표정이었다.
<2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