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하영 Dec 06. 2019

가끔 누군갈 그리워하는 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비누


그에게선 항상 비누 향기가 났다. 그것이 채소인지 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 미세하게 남은 그 향은 나를 감싸 안아줄 때나 젓가락을 챙겨줄 때, 또는 문을 열어줬을 때 내 코 끝을 건드렸다. 언젠가, 나는 묻고 싶었다. 그 비누의 향은 무엇이었냐고. 하지만 당신은 그저 은색 비누판에 반쯤 녹아있는 일그러진 비누를 아무 생각 없이 썼을 뿐일 거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누 향 따위 기억하지 않는 투박함이 더 좋았으니까. 행여나 그 비누 때문에 내가 나중에 힘들어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죽을 것 알면서도 우물 안에 몸을 던진 적이 있다. 그것은 어떤 희생이 아닌 그저 빠져 죽고 싶은 나의 마음이었다. 익사해도 좋으니 일단은 불타버린 나의 마음을 식혀야만 했으니까. 가끔은 당신이 내게 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상은 너라는 색으로 이미 범벅이 되었고 나는 그저 일을 하고 당신을 떠올리고 밥을 먹으며 당신을 떠올리고 지하철 문에 머리를 기대어 당신을 떠올렸다.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아플 때는 더더욱. 고기의 향이나 늦겨울의 바람 그리고 아름다운 한강의 뷰는 내 일상에서 이미 사라진 존재였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슨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엄마, 원래 사랑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게 맞아?



어느 날, 내가 구슬프게 울고 있을 때 당신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다면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그래, 좋아."


영하에 머물러있는 추운 방배 어느 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선다. 남색 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남자의 코와 귀는 빨갛게 변해있었고 나는 턱까지 두른 목도리에 얼굴을 서둘러 숨겼다. 뭐 울 생각은 없었지만. 사실, 울지 않으려고 여기에 도착할 때까지 허벅지를 억지로 꼬집고 있었지만 범람하는 서글픔은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안아줄리 없는 당신이 밉진 않았다. 안아주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내게 더 큰 여지가 됐었을 테니까. 그때 나는 흐느끼는 와중에 몇 개의 단어를 내뱉었는데 그것은 "고맙고" "싫고" "안 추워"와 "괜찮아" "몰라" 같은 말들이었다.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너는 곧잘 대답해주더라.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팔찌. 이것을 돌려주려고 왔다는 말이 경적소리와 함께 들리는데 나는 차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더랬다. 가슴을 들썩이며 뒤돌아서서 패딩 지퍼를 내리고 검은 목폴라 위로 낀 목걸이를 천천히 풀어낸다. 왼손에는 내가 준 팔찌, 오른손에는 그가 준 목걸이가 있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사랑이 응축되어 있던 악세사리가 내 두 손에 잡혔을 때 나는 그제야 이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참으로 참혹한 물물교환이었다. 어찌나 눈물이 많이 나는지 회색 아스팔트에 검은 자국이 아주 크게 물들어 있더라. 그는 소리 없이 내 등을 두드려준다.


“먼저 가볼게.”


아아, 결국 이별이다. 안 돼.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남은 모든 힘을 다해 그에게 달려가 손을 잡는다. 이후 손등을 코에 박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냄새가 맡고 싶었다. 알아내지 못한 그 향이. 너의 비누 냄새가.


이별


#2

그 냄새가 어떤 향인지는 결국 알지 못했다. 다만, 어떤 꽃향기인 것까지만 알았을 뿐이다. 그 뒤로 나는 길을 걷다 종종 고개를 돌린다. 이 많고 많은 사람들 중 혹시나 당신이랑 마주칠까 봐. 가끔은 그 멀끔한 얼굴이 보고 싶어서 말이다. 그때는 나,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친구는 그동안 내게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얘, 무슨 고생은. 그냥 연애를 했을 뿐인데.


그러고 보니 술도 마시지 않고 악세사리는 어디에 놔두었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거짓말 같겠지만 난 그를 잊었다. 아프지 않고 밥도 잘 먹고 있으니까. 그저 이별이 남긴 파편에 종종 가슴이 아플 뿐이다. 이런 불가피한 상황은 사랑했던 시절에 대한 대가가 아닐까. 가끔 누군갈 그리워하는 건 어쩌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책이 만들어지는 걸 바라볼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