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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하영 Dec 26. 2019

21세기의 어느 사랑이야기

오늘도 사랑이도다



그는 그녀에게 성질이 사납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게 전부 다 너 때문이라며 그의 등에 철썩 달라붙는다. 둘은 삐걱거리는 침대를 놀이터 삼아 서로를 부정적인 존재라고 소리친다. 그가 먼저 항복을 외친 건 그녀가 진심으로 팔을 깨물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차올라 온 땀에 그녀의 이마는 전쟁터가 됐지만 얼굴은 아이처럼 해맑았다. 이걸로 승리를 쟁취했으니까. 

그가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은 뒤에서 단단하게 끌어안는 방법밖에 없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안다 보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현실이 믿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내가 여기에서 이 사람을 안고 있다니 하며 가까운 행복을 인지하는 것이다. 나 지금 되게 행복하구나, 하고.


그러니까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겠지만 그는 참 외롭고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타지에서 올라와 중소기업을 다니며 빠듯하게 살아가던 그는 20대 후반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밥숟갈을 넘기다 울음을 터트리고 아직도 지갑이나 시계를 종종 잃어버린다. 마음은 어찌나 여린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을 질근 감고 한 여름에도 쓸쓸함을 추위로 느껴 이불을 목 끝까지 올리곤 했다. 고요한 밤에 혼자 길을 걸으면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그녀의 볼을 깨물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한 그다.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를 천천히 놓아주며 머리칼에 뽀뽀를 했다. 그러면서 괜히 머리 좀 감으라며 소리를 친다. 괜히 울컥했나,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이다.




#

퇴근 시간이 되면 그녀는 저녁 메뉴를 생각한다. 매번 진수성찬을 차리긴 힘드니 일주일에 한 번은 서로에게 요리를 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저번 주에는 송이버섯이 가득 들어간 볶음밥과 칼칼한 된장찌개를 먹었다. 아까 유튜브를 보니 짜파게티에 파김치가 맛있어 보이던데. 살이 포동 하게 오른 그의 얼굴을 생각하며 마트에서 애호박과 양배추를 고르는 그녀다. 조금 무겁게 본 장을 손에 쥔 채 집으로 가는 길은 행복했다. 반찬투정을 해도 매번 음식 사진을 찍고 옆에서 좋은 음악을 틀어주는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김치가 다 떨어져서 인터넷에서 브랜드를 고르다가 싸움이 붙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니 뭐라니. 맛이 없어서 분명히 쉰 김치를 만들게 뻔한데 자꾸 고집을 피워서 진심으로 손가락을 깨물었다. 엉엉 울며 바닥을 뒹굴다 손가락을 보니 피멍이 들어 깜짝 놀랐지만 이건 너의 각인이라며 껄껄 웃고 있는 그였다. 세상에 바보도 저런 바보도 없지.

며칠 뒤 둘은 새 김치에 짜파게티를 무려 5개나 끓여먹었다. 그들은 다급하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을 차분히 시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서로에게 무척이나 안정적이었달까.


#

그는 퇴근길에 두 번의 발걸음을 멈췄다. 한 번은 떡볶이집. 한 군데는 작은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였다. 월급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이런 자그마한 것들을 챙길 수 있는 것에 기뻐하는 그였다.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음악을 켠 뒤 포장해온 음식을 예쁜 접시에 담고 작은 팔찌를 소매 안에 숨겼다. 얼마 뒤, 축 쳐진 그녀가 집으로 들어오며 그에게 안긴다. 눈망울이 그렁그렁한 게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그래, 그래. 무슨 일이야. 

그녀는 명치 한가운데 이마를 박고 그의 흰 티에 작은 호수를 그린다. 안아주는 건 백번이고 천 번이고 할 수 있으니 말없이 서있었던 그다. 몇 분 뒤, 떡볶이가 식으니 조금 서두르자는 말에 아기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고 예뻐라.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두 캔을 꺼내며 오늘 액세서리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방에서 나오며 무슨 떡볶이를 먹으면서 재즈를 듣냐고 블루투스에서 당장 나가라며 소리를 친다. 참나 방금까지 그렇게 울어놓고선. 새침한 표정을 지은 채 식탁에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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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부족함 없이 사랑을 받고 자라온 꽃이었다. 인기도 많았고 연애도 끊긴 적이 없었건만 취직을 하고나서부터 모든 건 옛일이 되었다. 물론 하고 싶은 공부를 해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실상 회사에서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하나도 써보지 못하고 있었다. 버티는 게 답이니라. 버티는 게 답이니라. 삭막한 아침 회의에서 펜을 돌리며 마음을 다스리는 그녀의 모습이다. 5잔째 커피가 바닥이 났을 때 시간을 보니 9시 14분이었다. 고요한 사무실, 사파리의 어느 동물처럼 기지개를 켜니 우두둑 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으, 오늘은 이쯤 하자. 

집으로 가며 맥주는 무조건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블랑이야. 무조건 블랑이야. 

편의점에서 나와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누가 등을 톡톡 치길래 뒤돌아보니 코가 빨개져있는 한 남자가 에어팟 케이스를 건넨다. 어라 주머니를 살펴보니 케이스가 없다. 세상에, 콩팥을 잃을 뻔했네. 고맙다는 말을 하는 동시에 그의 얼굴이 눈에 비친다. 이 사람, 분명 몇 분 전에 울었다. 무슨 기운이었는지 몰라도 그때 그녀는 낯선 남자에게 왜 울고 있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이야기를 숨기지 않았고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사이좋게 맥주를 나눠마셨다. 그 날 둘은 사랑에 빠졌다.  


옆에서 스스스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살이 조금 쪘지만 여전하다. 그때 내가 에어팟 케이스를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아니 아니. 야근을 하지 않았다면 우린 만나지 못했겠지? 끔찍하다. 끔찍해. 

불현듯 차오르는 두려움에 그를 와락 껴안았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더니 금방 내 허리를 감싸준다. 사랑스러운 녀석. 빈틈이 많지만 그래도 참 바지런하고 올곧은 사람이다. 

내일은 조금 일찍 일어나서 토스트를 만들어볼까.

 

/


전등을 끈다. 주홍빛 불에 비친 그녀의 손에는 그가 선물해준 투박한 은색 팔찌가 끼어져 있었다.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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