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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하영 Jan 21. 2020

그는 서울에 온 게 불행이라고 했다

제법 현실적인 우리의 연애




그는 서울을 온 게 불행이라 말했다. 얼굴은 회색빛이고 턱선이 날카롭게 나온 그가 불행이라는 말을 처음 내뱉었다. 서울 사람인 나는 타지에서 상경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애인의 옆에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는데 불행이라는 말 한마디에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앞머리를 내리고 온 그다. 그래서인지 얼굴에 진 그늘이 더욱 짙어 보인다. 나는 고개를 반쯤 숙여 그의 안색을 살폈다.


뭐가 불행한데? 섭섭한 마음에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내게 쉽게 말할 리가 없었다. 얼마나 쌓였으면 이런 말까지 할까. 피어오르던 원망은 모성애로 인해 금방 사그라들었다. 안타까웠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가, 앙상하게 드러나온 턱이. 이발을 하지 않아 구레나룻이 삐죽 나온 것도, 코트에 묻은 보푸라기도 안쓰러워 미간 한가운데가 찡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내 애인인데. 어떻게 안아주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고요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결국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았는데. 푸석한 손을 엄지로 만지작거리며 허벅지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봤다.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사소했던 시그널들을 생각하며 애인의 우울에 나도 눈물을 흘렸다.


1월의 자정은 고요하다. 어깨가 말려있는 그의 옆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몇 마디 말을 건네니 그는 며칠 전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짓말이야. 나는 그것이 더 슬펐다. 급정거를 하듯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몇 발자국 앞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좀 전의 나처럼 고개를 숙여 내 안색을 살핀다.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과거가, 나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가 슬펐을 뿐인데. 내 앞으로 다가와 푸석한 입술에 입맞춤을 한다. 우리 소주나 한 잔 하러 가자면서.


잔잔한 두통에 눈을 떴다. 내 옆에는 아이처럼 새근히 자고 있는 그가 있다. 춥지도 않은데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어줬다. 이마에 잔잔한 물기가 있는 걸 보니 악몽을 꾸나보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즉에 안아줬을 텐데 말이지. 빈 속에 몇 병의 소주를 비워내며 그는 자신의 썩은 감정을 전부 게워냈다. 나는 단지, 하염없이 들어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 취한 그를 집으로 데려와 옷을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혔다. 미안해. 미안해.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오늘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이 운지 알아? 큰 숨을 내쉬며 단잠에 빠져든 그를 물끄럼이 바라본다. 오뚝한 코에 삐져나온 코털. 주름진 입술, 정리되지 않은 눈썹. 어쩌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됐는지. 속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폭풍을 느끼다 나도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깨지 않게 소리 없이 기지개를 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조금 괜찮아질 테다. 진심으로 걱정한 만큼 그도 온몸에 힘을 빼고 내게 기대었으니.



포트기에 물을 끓이며 창밖으로 피어오르는 일출을 바라본다. 

아름답다. 저 해도. 자고 있는 그의 얼굴도.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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