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랑을 위해
행복할 땐 글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행복할 땐 그냥 행복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예전보다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적더랬다. 낮고 우울한 것만이 내게 좋은 글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얼마 전, 삼촌과 전화를 했을 때 삼촌은 이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고 말했다. 사람은 사랑보다 이별을 더 많이 하니 보내야 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만남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좋은 사람이 있다면 저울을 두지 말고 표현하라고 내게 당부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것에 참 무색한 사람이었다. 표현을 하면 도망갈 것 같고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남겨진다는 걸 알면서도 헤어짐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못했던 걸까.) 이 과정에서 이별에 대한 면역이 생겼지만 마음의 건강은 잃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모든 것에 서툴렀던 것이다. 다리가 하나 부러진 사람처럼.
그 사람을 그리워하며 쓰는 글은 일종의 사랑의 물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모든 걸 토해내고 나면 금방 의연해졌고 그리움과 막역한 사이가 되어 담뱃불 빌리듯 영감을 빌리곤 했던 나다.
지난날을 기억해보자. 이별 후, 바닥에 나뒹구며 오열을 했던 것은 헤어지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능숙한 사람이 되어 뒤돌아 걸었을 때 돌아보지 않고 술을 마셔도 핸드폰을 쳐다보지 않는 인내가 생겼다. 더는 아프기 싫은 방어적 기세가 나를 영악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은 모든 걸 접어두고 여태 쓴 글을 읽으며 헛웃음을 뱉기도 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글을 썼냐고 하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이 이별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별도 하나의 죽음이라면 나는 당신이 떠나고 남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식된 글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행위들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새로운 사랑을 위한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영악함은 반드시 버려야 할 테다. 그건 마음을 좀 먹는 거니까. 조금 서툰 건 괜찮다. 칠칠맞은 사람이 더 사랑스러워 보일 때가 있듯 언제나 사랑할 준비만 되어있다면 자격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