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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하영 Jun 03. 2020

이건 소설에서나 보던 일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느끼는 감정



영화 봄날은 간다



그건 소설에서나 보던 일이었다. 그녀에겐 항상 데킬라 한 병이 있었고 가지런한 플레이 리스트가 있었다. 옷을 너저분하게 입는 듯했지만 내 눈엔 정말 멋있는 의상이었다. 제법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나도 그녀의 일상에 들어갔을 땐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설명하자면 마치 수족관에 처음 갔을 때 같은 느낌이랄까.

집에는 세 가지 원두가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내게 말했다.


“삼 년 동안 가본 카페 중에서 제일 맛있었던 커피 원두만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카페보단 우리 집이 더 예쁘니까.”


그녀의 눈빛이 향하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린다. 오래된 액자와 아이리버 MP3, 설거지가 필요한 묵은 커피잔, 몇 개의 선인장들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보면서 그저 ‘좋다’라고 생각했다. 원두 중 한 가지를 골라 커피를 마셨다. 작은 스피커에선 ‘Lisa Lovbrand’노래가 나오고 있었고 시간은 9시가 다 되어간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밝은 홍조를 띠고 있었고 그저 커피 한 잔과 주고받는 대화에 취해 이 밤을 보내고 있었다. 치즈와 아스파라거스, 조금 부족한 파스타 면에 토마토소스를 부어 저녁을 먹었다. 그녀는 반쯤 비어있는 데킬라를 가지고 와 “나는 집에서 먹으면 딱 한 잔”이라고 말했다. 바에 갔을 때는 몇 잔이고 마셨던 그녀였는데. 겨울 정전기로 날이 가득 선 머리카락을 보곤 웃음을 참으며 잔을 넘겼다. 


실제로 우리는 단 한 잔에 취했다. 설거지를 하고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우다 입을 맞췄고 나는 그녀의 수족관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방안은 그윽하다. 따뜻하고 진한 벵쇼가 어울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낭만보다는 낡은 투박함에 매료된 내 모습이 좋았다. 창문을 열어놓아 찬바람이 들어왔지만, 그녀와 나는 굳이 닫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것은 배려가 아닌 우리의 취향이었으니까. 천장에 빛을 잃어가는 야광별을 보며 어렸을 적 여행을 갔던 이야기를 했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닫으며 그녀의 이불을 여며주었고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지글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옅게 들리는 차 소리와 이불에 깃든 그녀의 냄새. 시계를 보니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라디오를 들으며 베이컨을 굽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이불 소리에 뒤돌아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옅게 미소를 짓는다. 잘 잤다는 말이 필요 없다는 건 서로 알고 있으니 하지 않기로 하자. 나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으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행복하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었다.





책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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