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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하영 Jul 19. 2021

제철과일과 사랑

당신과 인연이 된다면 제철인 것을 함께 나누고파요.




제철과일



과일을 그리 챙겨 먹지 않는다. 즐기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게 맞을까. 어쨌든 누가 챙겨주지 않는 이상 과일은 내게 예쁜 열매에 불과했다. 집 앞에는 작은 과일가게가 있는데 매번 그곳을 무심히 지날 뿐, 하나 기억나는 건 쪼그려 앉아 수박을 통통 쳐보던 한 사람만 기억날 뿐이다. 되게 매력적이었는데 말이야. 아, 요즘은 일이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오전에 집중하고 오후에는 멍을 때리는 편이다. 펜을 톡톡, 애꿎은 마우스 소리만 내면서 나는 멈춰있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도 일도 다 흐지부지라 일상이 지루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맛있는 걸 먹어야지. 요즘 집밥이 먹고 싶어서 종종 가던 식당으로 향했다. 잘 구운 불고기 위에 치즈를 녹여주고 3가지 나물과 갓무친 겉절이, 뜨끈한 콩나물 황탯국이 나와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곳은 매일매일 메뉴가 바뀌는데 미리 전화를 하면 묵묵한 주방장님이 천천히 메뉴를 읽어주신다. 다른 메뉴를 고를 수 없고 사장님이 하고 싶은 음식을 먹는 것이 여기에 오는 손님의 사명인 것이다. 바에 앉아 자그마한 접시에 담긴 음식을 하나씩 비워간다. 쌀알을 씹으며 나는 몇 번 한숨을 쉬었지만 재즈를 들으며 한식을 먹는다는 건 정말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뭔가 소화도 잘되는 것 같고 말이야.


"사장님은 요즘 행복하세요?"


그릇을 거의 다 비웠을 때쯤 젓가락을 입에 문 채로 내가 물었다.



"행복하기보단 즐거워요."


"왜요? 어떤 게 즐거웠어요?"


상채를 내밀며 물어보니 사장님은 내게 작은 접시 하나를 더 내밀었다.


"사계절 내내 제철인 것들이 한가득이잖아요."



작은 접시에는 새빨간 수박 4조각이 들어있었다. 후식으로 나온 과일이었다. 괜히 치! 하고 심통을 내고 젓가락으로 수박을 하나 베어 문다. 입안에서 바스러지며 설탕물 같은 게 혀 곳곳에 퍼진다.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눈이 번쩍 떠졌다.



"이거 왜 이렇게 달아요?"


"제철이라서요."



누텔라 잼을 처음 먹었을 때처럼 나는 연달아 수박 4조각을 먹어치웠더랬다. 먹은 반찬 향이 입에서 사라지는 상쾌함과 무엇보다 기분이 좋아지는 게 신기했다. 근데 배가 부르다. 조금만 쉬다 동네 한 바퀴 돌고 집에 가야지.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문을 여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 나른하다. 이런 게 행복인 걸까. 이곳에서 알게 된 나희경의 Acaso를 틀고 언덕을 내려간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 걷기 좋은 날씨였다. 골목을 돌고 돌다 목덜미에 미세한 땀이 느껴질 때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다시 마주한 과일가게. 형형색색의 아이들이 빛을 뽐내고 있다. 일부러 가까이 가 이리저리 살펴보는 척을 한다. 제철 과일이나 좀 사갈까 하면서. 사실, 옆쪽에 그때 본 매력적인 사람이 한 손으로 검은 봉지를 들고 자두를 먹고 있었다. 이 동네 사람이 맞나 보다. 되게 후리한데 멋지네. 어디서 본 기억이 있어 중지를 세워 통통 쳐보고 작은 수박 한 개와 자두 한 봉지를 구매했다. 다 먹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산 건 제철이고 그 사람이 자두를 너무 맛있게 먹어서이다. 어쨌든 턱에 힘을 주고 한 손에는 수박 한 손에는 자두를 든 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 사람이 한 번 쳐다봐주었으니 된 거다. 다음에 또 마주치면 좋겠다. 어떤 인연으로 사랑을 시작한다면 그대와 제철인 것들을 마구마구 먹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망상은 그만, 샤워를 하고 플라스틱 통에 수박을 썰어담으리라 다짐해본다. 오토바이 소리가 큼지막하게 들린다. 


이곳은 서울. 나는 혼자. 

오늘 나는 제철과일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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