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퀴프 세계문학상
엔젤 스타디움 단독 공연
런던 박물관 특별 전시회
5권의 책, 3장의 앨범, 32개의 그림
지난 3년 동안 그가 이룬 업적이다.
H 도시를 떠나는 전용기 안에서 오렌지 숲 같은 도시의 네온사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짙은 회색빛 턱시도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디자이너인 유리 안젤라의 생일 선물이었다.
아니, 프러포즈 선물이라고 해야 맞을까?
그녀는 육감적인 몸매와 고혹적인 눈매 그리고 매끈한 구릿빛 피부를가진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의 워너비였다.
유명세를 탄 그에게 먼저 다가간 건 안젤라였다.
그의 글은 정말로 매혹적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는 자신의 명성에 심취했음에 분명했다.
평범한 것은 점점 멀리했으며 특별하고 한눈에 반할 수 있는 사람들만 만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그녀
안젤라는 지금 A 도시에 있는 초호화 주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My dear'
턱시도 소매 부분에 새겨진 자수를 보며 눈을 감았다.
사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안젤라와 사랑을 나눌 때도, 진심으로 가슴에 끌어안을 때도 그 순간은 아주 잠깐 빛나는 별이었지
그의 인생에서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태 수많은 여자를 만나 사랑을 했다.
사랑
사랑?
"사랑은 뭔가.."
안젤라와의 짧은 키스를 나눈 뒤 셔츠 단추를 풀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당신 좋아하는 훈제연어 해놨는데."
"그래? 그렇지 않아도 오면서 생각했었는데."
"주방에 준비해놨어요. 아, 그리고 오늘 목욕은 같이 했으면 싶은데.."
"응. 당신 방으로 가면 되나?"
"아뇨, 당신 욕조에 준비해놨어요."
"알았어. 별 탈 없었지?"
"네."
"저기 안젤라."
세계 패션계를 한 마디로 주름잡는 암사자 같은 그녀가 그의 한마디에 연약한 수사슴이 된다.
그의 표정은 회색빛이었지만 태연하게 자신이 만들어준 셔츠가 역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네."
"할 얘기가 있어."
.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셔터
안젤라와의 이별을 취재하려는 세계 각지 방송사들이 그의 집 앞에 서있다.
공항으로 가면 정식 인터뷰를 할 것이다.
감성시대가 된 이후로 솔직함은 곧 사람들의 이해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저명한 사람의 솔직한 터놓음은 특히나 더더욱 말이다.
헤어짐은 만남이 만들어낸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던가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안젤라와 찍은 마지막 사진 한 장을 지운다.
과연 그녀는 그를 이해해주었을까?
그는 새빨간 장미 같은 그녀를 왜 사랑하지 않았을까?
.
"머리가 조금 아픈 것 빼곤 괜찮습니다."
A시티 어느 깊은 곳 아픔 생성기 앞
그는 검은 코트를 입은 채 전담 매니저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고있다.
"좋아요. 이번이 벌써 9번째군요. 저희도 이례적인 일이라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XX 씨 덕분에 승진도 했고요. 매번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기, 다음 작품 계약기간까지 40일 정도 남았습니다. 안정기까지 최대한 빨리 부탁드릴게요.
돈은 얼마든지 더 드릴 테니까요."
"물론입니다. 이번에 임상실험까지 끝난 약물을 복용하시면 안정기 기간을 줄일 수 있을 거예요.
근데 XX 씨. 다음 삽입 날 땐 아마 장소를 옮길 듯합니다. 고객 중 한 명이 이곳을 누설한 것 같아서요.
들킬만한 자료는 없지만 혹시나 해서 U시티로 이전을 할 겁니다. 다음번에 연락 주시면 저의 쪽에서 교통편을 준비해놓겠습니다."
"네.. 근데 누가 누설을 한 거죠?"
"아, 페러나이 그린이라는 아이가 그런 것 같습니다. 페트릭 회사 CEO의 딸이죠."
"그 가죽재킷 입었던..?"
"기억하시는군요."
"처음 왔을 때 아마 봤을 거예요. 유별난 여자군요."
"맞아요. 그린 양도 VIP였는데 삽입할 기억을 구상할 때 아주 하드 한 것들만 말해서 전담 매니저가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몰라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하, XX 씨는 거기에 비하면 세발의 피죠."
"아하.."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요? 기계 연결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한 채 기계 안에 누웠다.
이곳은 어느새 그에게 아늑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천장 파이프에서 하안 연기가 흘러나온다.
'아프고 싶다.'
그는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의식이 흐려져갈 때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그였다.
이렇게 그는 점점 아픔을 만들어간다.
가슴속엔 한 가지 밀려나가는 게 있었는데 그는 그때 미처 알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아픔만 남아 이제 더 이상 사랑 할 수 없는.
,
아픔 생성기 4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