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그게 정답일 수도 있겠네."
"나쁘지 않았어?"
"응. 좋은 이야기였어 안나."
아더는 유리잔에 남은 위스키를 마저 넘기며 허공을 응시했다.
오늘 안나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한지 모른다. 워낙 재밌게 말하는 아이라 즐겁긴 했지만 이젠 조금 지루해지려고 하던 참이었다.
사실 아더는 그랬다. 그렇게 떠들어대는 사랑이 뭔지, 2년 전에 만났던 앤이 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몇 주전 파티에서 만난 그녀가 사랑이었는지 조금 헷갈린 것이다.
"아마도 제일 강렬했던 게 사랑이겠지?"
아더가 물었다.
귀를 쫑긋하던 안나는 그의 말에 박수를 치며 그게 정답이야!라고 크게 외쳤다.
그리곤 이내 턱을 괴며 물끄러미 아더를 바라본다.
"그럼 말해봐."
"뭐를?"
"제일 강렬했던 여자 말이야."
"재미없을 거야."
"사랑 얘기를 재미로 듣니? 어서. 응?"
안나의 어리광에 아더는 작게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그래. 몇 주전. 아니, 정확히 3주 하고도 이틀 전이었지.
아더는 금세 말라버린 유리잔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나, 이런 적이 있었어. 그때 난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했고 시간 따위 가늠하지 않은 채 춤을 췄었지. 셀린느의 홈파티는 3일 동안 지속됐었잖아. 그래서 매일 가기로 마음을 먹은 터였지. 음. 그러니까 스테이지. 내 앞에 있던 여자는 머리가 연한 파스텔 블루 톤이었어. 그녀는 3일 내내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의 갈색 립스틱 향과 맑은 위스키, 그리고 말보로 담배가 섞인 숨 내음이 좋았어. 아주 가까이 있어서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는데 목소리도 정말 달콤했지. 어느 날은 힐끔 쳐다보다 눈이 마주쳐버렸는데 잔을 내려놓고 나에게 다가오더군. 오랜만에 심장이 떨렸어. 마치 그것을 한 것처럼 말이야. 나는 발가락에 힘을 잔뜩 주고 미소를 지었어. 왜냐하면 나도 그녀만큼이나 고혹적이어야 했으니까.
안녕.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
우린 곧장 서로의 허리를 휘감고 마음대로 춤을 췄어. 스텝이 조금 엉켰지만 아무렴 괜찮았어. 콧등을 비비기도 하고 쇄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기도 했지. 그때 난 어딘가를 헤엄치고 있었음에 분명해. 그 순간만큼은 기억이 나질 않거든. 다만 어떤 느낌이 있을 뿐이야. 인간적인 냄새와 낮고 오뚝한 코. 그리고 땀으로 진득해진 등 피부 같은 거 말이야. 머리가 다 젖을 때까지 리듬을 탔던 것 같아. 새벽이 지나는 동안 오롯이 춤만 췄으니까. 그러다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졌을 때 난 그제야 시계를 쳐다보게 됐지. 그리고 모든 재미를 잃고 말았어. 더 이상 나에게 남은 건 없었으니까. 어디로 사라졌냐고?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안나 정말 재밌는 건 뭔 줄 알아? 정말 재밌는 건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에게 고마움이 느꼈다는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그랬지. 왜냐면 나에게 키스를 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아주 몽롱한 존재로 나에게 남아있어. 너무 강렬한데 흐려서 더 좋은 기억이랄까.."
아더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바텐더에게 손짓으로 위스키를 한잔 더 주문했다.
안나는 흥미로운 얼굴로 아더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것도 사랑일까 안나."
슬픈 눈으로 말했다.
아더는 슬프지 않았지만 왠지 자신이 했던 것이 사랑 같아 그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 이런 달콤한 녀석."
안나는 그런 아더가 사랑스러운지 그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뽀뽀를 했다.
"뭐든 좋아. 가장 뚜렷한 게 사랑이지."
"그렇다면야."
"그래, 그게 사랑인 거지."
"응."
"찾고 싶진 않니?"
"무슨 수로 찾아? 괜한 미련일 거야."
"셀린느의 친구일 수도 있잖아."
"아니야. 절대."
"낯선 사람이었구나? 도대체 그 여자랑 무슨 대화를 했길래."
"몇 마디 나누지 않았어. 그냥.."
"그냥?"
"그냥. 나이랑 이름, 직업 그런 것들 뿐이야."
"너 설마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지?"
"사실 전부 기억 나. 안나."
"근데 뭐가 문제야? 당장 찾아. 나도 도울 테니까."
"괜찮아."
눈썹을 지켜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나는 그런 아더가 이해되지 않는 듯 어깨를 한껏 올렸다. 그렇게 강렬하다더니. 그리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 북을 뒤지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가 답답했지만 아더의 표정은 초연하기 그지없었다.
"아더. 이건 기회야."
아더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동정 어린 어투로 말했다.
"물론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만난다면 나는 그녀를 사랑할 수 없을 거야."
"왜?"
"그녀는 파티에서 아름다웠으니까. 단지 그것뿐이야. 우린 그 오묘한 것을 즐겼어 안나. 설사 내가 그녀를 찾아서 연락을 한대도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야. 난 기억 속에 그녀를 사랑하는 것뿐이니까. 실제로 만난다면 환상이 깨져버릴 거야."
"아더 겁쟁이야 넌."
"그래도 좋아. 나는 그녀를 사랑해."
그의 말에 웃음이 터진 안나다.
아더는 바텐더에게 받은 위스키를 목으로 넘기면서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이 상태가 좋았던 걸까.
"정말이지 넌.."
"난 괴짜야."
"아니 넌 머저리야."
"후후 인정할게 오늘만큼은."
아더와 안나는 조금은 빨개진 얼굴로 다시 잔을 부딪혔다.
티브이에선 럭비 경기가 나오고 있다. 누군가는 포켓볼을 또 누군가는 낯선이와 달콤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더는 가게 안을 한번 둘러보며 옅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안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흐렸던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걸 알고 속으로 정말 기뻐했을 것이다. 2년 전에 앤과 헤어지고 감정의 마지노선에서 사경을 헤맸다.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많은 고통이 있었는데 시간이 무색할 만큼 아주 짧은 순간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어떻게 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탈했지만 아더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키스를 하지 않은 그녀가 머릿속에 흐리고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녀는 지금쯤 또 다른 파티에서 낯선이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까. 아니 스타벅스에서 아르바이트 중일 수도 있겠지. 아니면 잠을 잔다거나 염색을 하고 있을 수도 있어. 음.
아더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맑은 위스키를 마시며 그녀를 생각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홀로 생각했다.
행여나 마주친다면.
그땐 두서없이 당신을 그리워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노마 진 모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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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노마 진 모텐슨은 마릴린 먼로의 본명이랍니다.
그녀의 사진을 보며 은연중에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