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만 잠시 쉬다 가실래요?
<3분 소설> - 오솔길
2007년 10월 13일
PM 3:14
늘 걷던 길을 다시 눈으로 가늠해보았다.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 긴 나의 오솔길
멀찍이 있는 푸른 느티나무를 보고 오랜만이라고 옅은 미소를 보낸 뒤 이어폰을 귀에 꼽았다.
오늘은 이 곡 하나로 충분할 거야
<정재형 - 오솔길>
낡은 가죽 가방을 어깨에 메고 발걸음을 떼었을 때 서풍이 불었다.
늘 내 오른쪽에 서있던 당신, 당신이 말한 그 부드러움이 바로 이런 거였나
어찌 됐든 이 길에 난 홀로 서있고 그때 느끼지 못한 세세한 자연의 생동감을 느낀다.
당신이 나 대신 느꼈던 감정들까지도
사계절을 담고 있는 이 길에 내 추억도 담겨있다.
해와 달 그리고 여름에 본 맑은 나뭇잎이 눈 속에 묻힐 때까지의 시간들
지금 난 내 추억을 묻으러 온 것이다.
설사 그러지 못하더라도 날 위로해줄 수 있는 건 저 느티나무와 이 오솔길밖에 없다.
시간이 꽤나 지났지만
은은하게 남은 추억들은 내 마음이 부정을 하는지 쉽사리 잊을 수가 없다.
여기서 나는 그대와 걸은 발걸음과 숨소리 하나까지 기억하는데
그렇다고 내 가슴을 퉁퉁 치며 잊으려고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실연의 아픔이 덧되여도 난 참 많은 것들이 아까웠으니까
소중함이 떠날 때 사소함들은 후회가 된다.
그래서 난 모든 것이 아까웠나 보다.
.
"우리에게도 계절이 있다면 지금은 겨울일까?"
이 길에게 내가 물었다.
다시 꽃을 피워 낼 널 보면 부럽기도 하고 막연하게 질투도 나고
자갈돌을 발로 차고 발걸음의 템포를 낮추었다.
클래식을 듣는 탓인가 낙엽 밟는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온다.
발 끝을 보며 걷는 게 괜스레 울컥해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막힌 목으로 침을 삼켰다.
우는 건 몰라도 참는 건 누구보다 익숙해져 버린 나다.
.
한참을 걷는 기분이지만 아직 느티나무에 도착하지 못한 건
당신이 없어서고
가파오르는 숨도 당신이 없어서다.
우린 줄곧 몇 번이고 이 길을 왔다 갔다 했었으니까
나, 점점 다가오는 느티나무를 보며 많은 생각했다.
곧장 안개처럼 사라졌긴 했지만 이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 같아서
저 나무는 오솔길과 추억의 결정체가 아니던가
하나의 로망이 돼버린 그때의 일상은 마치 꽃을 떠나가는 한 마리의 나비 같아 보였다.
잡을 수 없음에
난 그저 멍하니 보고 있는 거다.
.
오랜만에 만져보는 이 촉감
우뚝 서있는 느티나무에 크게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기로 했다.
가방을 풀고 바지에 흙이 묻는 것도 모른 채 엉덩이를 깔고 앉아 삼각대를 조립한다.
10월의 하늘은 정말 높다.
옅푸른 색에 구름도 없고 잊을만하면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낭만적인 기분도 들었다.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자리에 서있자 하니 초연한 마음이 든다.
이렇게 위로받는다 난
결국 여기까지 와서
찰칵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코를 높게 들어 바람을 들이마신다.
아름다운 길과 추억의 나무를 벗 삼아 추억을 들이마셔본다.
이렇게 조용한 우리의 공간에 혼자 있는 게 익숙하진 않지만 점점 편해지는 것에 날 위로한다.
그리고 혹시나 당신이 날 생각해 여기에 온다면 볼 수 있게
이 오솔길 끝에 우리의 사진을 내려놓는다.
우리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을
내 품에서 사진을 떠나보내며 난 추억을 내려놓는다.
이런 변명 하에 희망을 품에 안지만
아마 기적은 없을 것이다.
.
오솔길을 다시 걸어나오며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낀 건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덜어내서가 아닐까
다시금 뒤돌아본다.
아름다운 길과 내 추억을
.
지금은 힘들지만
이러다 보면
언젠가 이 오솔길을 잊는 날이 오지 않을까?
보고싶은 나의 그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