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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Feb 08. 2019

언어의 정원 / 신카이 마코토

연극, 조연, 실패작 - 아카즈키 쇼우타를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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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일요일

트레바리 씀-둘일 에서.


*

책을 읽으면서 저는 주인공보다 오히려 타카오의 형인 쇼우타에게 관심이 갔어요. 언어의 정원이 사랑의 시작을 다룬 이야기라면, 사랑의 끝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멀쩡히 잘 사귀고 있는 쇼우타-리카 커플을 깨버렸어요(?). 책에 나온 쇼우타를 상상하면서 연애를 끝낸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어울리는 제목이 생각나지가 않네요..책 처럼 지어봤는데 괜찮은 거 하나 지어주세요...



*

 리카? 아, 테라모토 리카 말인가. 그녀와는 진작에 헤어졌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무대에서 리카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 뒤에 조명이 하나 더 켜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조명이 아니고 내가 그녀에게 반한 것임을 깨달았을 땐 이미 연극이 끝나고 무대 뒤에서 그녀와 마주하고 있던 때였다.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갖고 싶은 것이 생겼다.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었는데, 마트 바닥에 누워 생떼 부리는 아이처럼 제발 갖게 해달라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드디어 손에 쥐고 나니 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나보다 항상 실적이 좋아 거들먹거리던 케이타 녀석의 면상이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넌 영업왕이지는 몰라도 난 이런 애인이 있는 놈이야. 그 녀석이 자주 간다던 고급 이자카야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리카와 식사를 한 적도 있다. 제발 마주치길 바라며. 만나면 해둘 말과 표정도 연습해뒀다. 그 녀석,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져선 다음 날 회사 곳곳에 내 이야길 퍼뜨리고 다니겠지. 진짜 승리자는 나라고.


 우월감과 성취감에 취해있을 무렵, 한 번은 공연을 마친 그녀를 데리러 간 적이 있었다. 꽃 한 송이를 사서 몰래 대기실 밖에서 기다렸다. 그녀가 대기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다가가려는데 꽃과 선물을 잔뜩 든 남자들이 리카 앞에 모여들었다. 그중엔 꽤나 부유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도 있었고 연예인으로 보이는 듯한 외모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그들과 그들이 가져온 선물들 앞에서 리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순간 내가 들고 있던 장미 한 송이가 부끄러웠다. 그들에 비하면, 리카에 비하면 나는 한심하고 평범한 영업 직원이었다. 마음속 어딘가가 쪼그라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화가 났지만 누구에게 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대로 집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다시는 리카의 공연장에 가지 않았다. 공연장에만 가면 리카는 태양이고 나는 태양을 갈망하는 반지하의 세입자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선천적으로 유머감각이 없는 나는 그녀를 웃게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꽃과 선물들 앞에서 보여주던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리해서라도 그녀를 웃게 만들고 싶었고 당신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데이트를 하고 나면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것조차 부담스러울 땐 본가에 찾아가 끼니를 때우곤 했다. 어머니에게 타카오는 어쩔 거냐는 핑계를 내세우며.


 동거를 시작하고 나서는 평범하고 소소한 날들이 이어졌다. 집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이토록 따뜻한 일이라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퇴근을 하면 카레를 만들어 먹고 주말엔 공원을 산책하며 만나는 개들을 보며 서로 이 개를 키우자며 작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뚝뚝한 성격에 영업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나는 (애초에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한 부서였다) 실적이 좋지 않았다. 실적이 부진한 직원들에게 곧 권고사직이 내려질 거라는 소문이 회사 내에 돌고 있었다. 전에도 이런 소문이 돌았지만 이번은 단순히 겁을 주려는 것 같진 같았다. 팀장이 따로 불러 이 일이 본인에게 맞는 일인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으니까. 아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살아남아야 했다. 고객들에게 억지웃음을 짓고 상사에게 시달리고 나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녁엔 뭐가 먹고 싶어,라는 리카의 기대 섞인 물음에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리카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네 남자친구가 사실은 영업 부진아라고, 이제 회사에서 내쳐질 상황이고 동거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회사 일 때문에. 짧게 얘기하곤 방으로 들어가 저녁도 먹지 않고 잠을 들었다. 내가 말이 없으면 리카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런 날들이 잦아졌다.


 어느새 우리 사이에 말 수가 줄어들고 그 빈틈은 나의 짜증 섞인 한숨들이 메꾸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오늘은 극단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재잘거리던 그녀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줄이고 있다는 것을. 그녀를 보기만 해도 초승달처럼 휘어지던 내 눈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리카는 왜 그러는 거냐고 화를 내는 대신 힘내라며 새로운 요리를 연습해서 내놓기도 했고 기분 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며 동물원에 날 끌고 가기도 했다. 날 위해서라는 건 알면서도 솔직히, 뭐랄까. 귀찮았다. 그녀를 대하는 나의 달라진 태도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을 정도니까. 그러면서도 리카가 걱정되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걸까. 리카가 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불렀다. 오래간만에 식탁에 마주 앉아 리카를 바라봤다.


내가 쇼우짱을 왜 좋아했는지 알아?

…...

오빠의 당당한 모습이 좋았어. 그런데 요즘 오빠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무엇 때문에 갑자기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빠가 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상대에게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니. 그녀의 말 덕분에 몇 주는 정신을 차렸던 것 같다. 굳어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몇 번인가 웃음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우리 사이는 이미 추락하고 있었다. 낙하산을 폈다고 떨어지는 걸 멈출 수는 없다.


 회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그녀는 식탁에 앉아 홀로 앉아 있었다. 왔냐는 말에 간단히 대답하고 방에 들어가 지난 주말에 새로 산 시디를 틀었다. 듀엣 성악가가 부르는 곡들이 이어졌다. 회식 때 노래를 꽤나 잘 불러서 놀랐던 여직원이 떠올랐다. 왜 갑자기 그녀가 떠오르지? 앨범 커버를 살펴보고 있는데 그녀가 방문을 열었다. 내 옆에 앉은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니 그녀가 자신이 요새 이상한 것 같다며 말을 꺼냈다.


뭐가 이상한데?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슬퍼. 왜 그런지 모르겠네.


 일 때문에 그런 걸 거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일 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하아. 어쩌라고. 네 눈엔 회사에서 하루 종일 시달리고 이제서야 쉬고 있는 내 모습은 안 보이는 거야? 짜증 섞인 한숨을 던지며 말했다.


나도 힘들어.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인 뒤 입술을 다문 채 가엽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말이 실수로 그녀에게 꽂힐 때마다 그녀가 보이던 표정이었다. 실망이야,라는 말을 하는 듯한 저 표정.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또 죄인이 된 것 같아 싫었다.

쇼우짱, 이제 내 얘기를 들어 줄 여유도 마음도 없는 거구나.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떠났다. 함께 한 시간치고는 참 싱거운 마무리였다. 슬프게도 슬픔보다 해방감이 먼저 밀려왔다. 그 후엔 죽기 살기로 일에 매달려서 영업 실적이 살짝 올라 권고사직을 면했고 몇 개월 뒤엔 작은 집으로 옮겼다. 데이트와 선물값으로 항상 비어있던 계좌는 어느새 조금씩 차올라서 오래간만에 여행도 갔다.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친구 녀석들을 만나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카와 나는 둘 다 연극을 하고 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리카는 무대에서, 나는 그녀의 앞에서. 나는 그저 리카라는 연극에 잠깐 등장하는 조연 1이었을 것이다. 조연 1과 헤어져 슬픔에 방황하던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해피엔딩을 완성하기 위해 쓰인 조연. 그냥 그렇게 지나쳐버리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나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그날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아니, 그전에 회사에서 잘릴지도 모른다고, 두렵다고 말했으면, 아니, 그녀가 반했던 나의 당당한 모습이 사실은 무리해서 연극을 하고 있던 거였다고 말했다면 우리의 지금은 지금과 달랐을까.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녀를 더 웃게 만드는 것보다 덜 울게 만드는 게 중요했을까. 잘 모르겠다. 하하. 이제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나의 연극은 처참히 실패했다는 것. 이 연극의 말미에 내가 건질 수 있었던 건 단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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