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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Feb 24. 2019

번호 좀 줄래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들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상대가 중년 여성과 남성이라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머님과 아버님들에게 번호를 엄청 따인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물어봤지만 '네가 어른들이 좋아할 얼굴인가 봐'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런가? 거울을 들여다보니 정직하게 생긴 것 같긴 하다.


에피소드 1.

21살 때였다.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 잔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밖으로 나와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사장님이 나를 부르며 여기서 아르바이트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중이라 힘들 것 같다고 하니 아쉬워하시며 그 가게의 단골이었던 선배를 보며 자주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그 뒤엔 사장님과 친해져 엠티에 갈 때 버너도 빌리고 대용량 뻥튀기를 얻기도 했다. 어느 날 사장님이 국수를 해주신다길래 먹으러 갔는데 갑자기 자기의 아들을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하셨다. 설레는 마음으로 '정말요? 몇 살인데요?'라고 물었고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중 2야...'


사장님은 3년 뒤에도 나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제 고 2 됐어... 좀만 기다려봐...'


사장님, 여전히 잘 지내시죠?



에피소드 2.

자취방 근처에 자주 들르는 편의점이 있었다. 비슷한 시간에 포인트 적립을 항상 하다 보니 사장님이 내 이름까지 외워 버리셨다. 사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친해졌는데 마침 아르바이트를 구하신다길래 내 절친을 소개해줬다. 워낙 일을 잘하는 친구라 사장님은 고맙다는 의미로 몇 번 나와 친구에게 밥을 사주시곤 했다. 여기까진 참 좋았는데 친구가 알바를 그만둔 뒤에도  나에게 종종 연락을 하셨고, 나는 조금씩 사장님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친구랑 셋이서 함께하는 식사자리는 괜찮았지만 둘이서 식사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사장님이 일하시는 시간대에는 편의점을 피해 다녔다. 나중에는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그 편의점을 아예 이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가끔씩 그 근처를 가게 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좋았던 분이고 좋았던 곳인데. 함부로 단골 가게를 만들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에피소드 3.

작년엔 한창 운동에 빠져 헬스장에 출근도장을 찍을 때가 있었다. 그날도 운동을 마치고 씻고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옆에서 머리를 말리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아가씨는 학생인가 직장인인가?'라고 물어보셨다. 그 뒤로 아주머니는 나에게 몇 살이냐, 무슨 일을 하냐, 심지어 월급은 얼마 정도 받느냐 까지 물어보셨다. 정말 궁금한 게 많으시네, 라는 생각을 하며 대답을 해 드렸는데 아주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가씨 너무 열심히 산다... 우리 딸이랑 친구 해줄 수 없어요?'


사람은 친구를 따라가는 법이라며 자기 딸에게 좋은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며 딸과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번호를 달라고 하셨다. 그때는 나도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몇 개월 되지 않았고 동네 친구도 없었고 면전에 대고 거절하기도 뭣해서 순순히 번호를 알려드렸다. 헬스장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슬슬 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혹시 전도 활동을 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닐까? 이상한 사람은 아닐까?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번호를 줬지? 내가 딸이라면 엄마에게 얘기만 듣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려고 할까? 나 역시도 이왕이면 나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가 필요한데? 전화와 문자와 카톡까지 보내는 아주머니에게 죄송스러웠지만 처음 본 누군가와 급격히 친해지는 건 낯을 가리고 겁이 많은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었다. 겁이 났던 나는 거절 메시지 대신 차단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에피소드 4.

내가 근무하는 과학관은 동네 주민들의 산책 코스에 놓여있어 주변 어르신들이 자주 들어오신다. 그 날 오후에 안내 데스크를 맡고 있었는데 산책을 나온 어느 아주머님이 나에게 말을 거셨다. 대학생인 줄 알았다는 말씀에 기분이 좋아 대화를 조금 나눴는데 갑자기 아주머니께서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것 까진 감사 한데 이번에도 번호를 달라고 하시는 거였다. 하... 어떡하지... 싫었지만 일단은 드렸다. 그날 저녁에 전화가 오길래 받지 않았고 ‘이 번호 받지 마’라고 저장까지 해놨다. 과학관 직원들에게도 이런 분이 계시다고 얘기를 해놨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다른 직원도 번호를 줬고, 그분이 교회 권사님이시라는 것도 알아냈다)


일주일 뒤, 아주머니를 잊어갈 무렵, 또 그 아주머니가 과학관을 방문하셨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내 얼굴을 잊어버리셨는지(대학생 같다면서요! 예쁘다면서요!) 또 번호를 달라고 하시는 거였다. 이번에는 안 되겠다 싶어 용기를 내어 ‘지난번에 번호 드렸는데, 전화는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자신은 전화한 적이 없다, 여기 매일 오는데 전화를 왜 하겠냐고 하셨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는 이 동네의 통장이셨고 동네의 많은 소식과 정보,를 알고 계셨으며 과학관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까지 가지고 계셨다. 이 분과 친해지면 우리 과학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해 주시는 건 좋은데, 제가 이상한 전화에 많이 시달려서요... 번호 드리기가 좀 그랬어요’라고 하니 자신은 절대 전화하지 않을 거라던 아주머니. 다음에 오시면 커피 한 잔 타 드릴게요,라고 말씀드리니 이미 마시고 왔다며 쿨하게 내려가셨다.


그런데 나중에 번호를 확인해보니 그 아주머니가 전화하신 게 맞았다. 저장하다가 잘못 누르셨겠지..ㅎ 다음 주에도 놀러 오세요.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처음 보는 아주머니, 아저씨와도 대화를 잘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내가 하는 건 그냥 맞장구 쳐주기에 불과하지만. 번호만 달라고 안 하시면 참 좋은 말동무가 되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전도 활동과 도를 아십니까는 그렇게 칼 같이 잘 쳐내면서 왜 어른들의 부탁에는 절절매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서 번호를 준다는 건 나와 상대 사이에 그어진 선 하나를 넘어오는 일이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그렇다. 난 잘 모르는 사람이 섣불리 그 선을 넘으려고 하면 겁이 나고 오히려 그 사람이 싫어진다. 어르신들 눈에는 예의 바르고 싹싹하게 보였는데 갑자기 사라지거나 차단을 해버리니 답답하셨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혹시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을까 봐 죄송스러워진다 (죄송해요. 저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어요.).


어르신들의 관심과 사랑 덕분에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겼지만 이런 일은 이제 그만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를 위해 조금은 단호해지려고 한다. 앞으로 어르신들이 번호를 물어보면 저 얼굴은 그렇게 안 보이지만 낯을 엄청 가리는 사람이라서요... 친해지면 그때 드릴게요,라고 해야지. 친해지는 게 언제냐고요? 글쎄요... 세 번은 만나봐야 알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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