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제

by Minnesota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곧바로 브런치가 먹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은 사둔 등심으로 요리를 하겠다고 했고 대신 커피는 배달로 시키라고 한다. 스벅 배달을 시킨 후, 기다린다.


밥을 먹었다. 등심으로 만든 제육볶음일 뿐이다.


할 일이 없는 나는 할게 많고 마음이 급한 남편을 뒤로 한 채 강아지와 걸었다.

강아지는 이미 남편과 1시간 가량 산책을 끝마치고 나서 다시 나와 걷는 것이다.

영등포 살때는 평지가 많아 만보는 쉽게 채웠으나, 여기와서부터는 만 보 채우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게 내가 게을러져서 인지, 아니면 언덕배기에서 살아서인지, 알수는 없다.


하여간 낙산공원에 갔다가 커피를 하나 더 픽업하러 내려왔다가 강아지에게 물을 주고선 더 걷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해도 고작 6천보를 채운 것이다. 샤워를 하고 남편에게 사온 커피를 나눠준다.


르 클레지오의 <조서>를 계속 읽는다. 드디어 뇌리에 강렬하게 박힌 그 장면.

당구공을 던져 흰 쥐를 죽이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사우나에 갖고가서 그 부분까지 책을 읽고 덮었던 기억이다. 그 책을 보면 주인공은 이름 모를,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검은 개를 좇아 간다.


어쩌면 그 주인공과 검정 개는 나와 내 강아지의 모습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개에게 끌려가듯이 걷는다. 혼자 나가서 산책하는 일은 이곳에 와서 한번도 없었다.

영등포에서 사는 4년간은 10 중 8은 혼자 걸었다. 당시엔 강아지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산책할때 혼자 걷는게 사실상 엄두가 안난달까.


페이스북 과거의 오늘을 보니 나는 2013년 7월 20일에 혼자서 신촌 카리부 카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아마도 나는 기사를 썼을 것이다. 당시에 나는 학보사 영문기자를 했었다.

매주 1개의 기사를 써서 올려야 했고, 나는 그 작업을 주로 일요일 신촌에서 했다.


신촌이 딱히 집과 가깝진 않았으나 카리부 카페 특유의 미국 분위기와 맛있는 모카가 좋았던 것 같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그 곳에서 분명 모카, 특히 터틀 모카를 마셨을 것이다.

14년도부터 나는 그곳에 갈 일이 없어졌고(14년도 상반기에 나는 언론사 인턴을 했다), 자연스레 카리부는 내 머리속에서 사라졌다.


카리부에서 글을 쓰고 가끔은 남자를 만났다.

당시 만나던 사람은 키도 크고 등치도 컸고 오토바이를 즐겨 탔으며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 때 나는 뒤늦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고 23살의 나는 그 오토바이 뒷자리를 자주 올라탔던 기억이다.

당시 여름이었고 나는 그 사람과 질풍노도의 시기를 같이 보냈다.


그 사람과 나는 요샛말로 하자면 open relationship 중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도, 나도 서로에게 얽히지 않은 채 바람 불듯이 지냈다.


본가에 살던 때 나는 퇴사를 하고 집에 쳐박혀 있던 시절 자주 걸었다.

당시에 나는 지금보다 15키로 정도 덜 나갔었고 할일이 없는 나날을 보낼때 거의 매일같이 걸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밤이든 낮이든 상관 없었다.

아마 26살, 29살 무렵이었을 것이고 특히 걷는 것에 집착했던 때가 29살이었다.


26살의 나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29살보다 더욱 잿빛이었던 기억이다.

그렇게나 젊었던 나인데 잿빛으로 물들인 나날이었다니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지도교수님은 facebook에 아주 열심히 posting을 한다.

사실 전체공개로 올리는 글이라 내가 친구가 아니어도 볼 수 있는 포스팅이다.

거의 매번 자신의 일상을 꽤나 상세하게 공유하는 글을 올리신다.


나는 어느순간부터 sns에 글을 올리는 일을 멈췄다.

아마도 26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런 행위 자체가 매우 부질없다고 여겼던 기억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상처란 상처를 온몸으로 다 받아낸 뒤라서 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남편은 나에게 새로운 별명을 지어줬다. '망치'

망치가 뭔 의미냐고 계속 묻는다.

'딴딴해보이고 건강해보이고 강력해보이고 힘이 세보이고 활기차 보인다'의 의미란다.


그렇구나 하지만 사실 잘 이해는 안 간다.

남편은 틈날 때마다 그때그때 다른 별명을 나에게 붙여준다.

그 이유도 나는 알 수가 없고 물어봐도 아마 대답을 듣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의 나를 아끼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날이 덥고 습하다.

아침에 강아지와 나가자마자 느껴지는 습도로 인해 나는 자칫 바로 집에 돌아갈뻔했다.

바르고 온 선크림이 땀에 곧바로 지워지는게 느껴졌다.


그래도 걷고 왔다. <조서>의 아담처럼.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