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추석 연휴 둘째날이다.
오빠는 아침 일찍 내 아침을 준비해두고, 할머니 산소에 갔다.
내가 왜 안 갔냐하면,
글쎄다.
혼인신고는 했지만 나는 아직 식을 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의무감에 가득찬 연휴에 해야만 하는 일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빠의 의사를 물었다.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본인이 내 입장이어도 부담스러울만한 일이라며.
그래서 그냥 그러기로 결정을 했고 나는 집에 남아 있다.
요새는 미국 코미디언 유튜브 채널을 즐겨본다.
한 시간 가량 과일스무디, 커피를 마시며 코미디 영상을 보다가 대학원 수업을 틀어놓고 이 글을 쓰고있다.
항상 오빠랑 같이 있다가 집에 이렇게 혼자 있는게 낯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좋기도 하다.
그렇게 멍을 때리던 중에,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훑어보다가 우연히 지인의 프사가 바뀐 것을 발견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지인'이라고 애매하고 부르는 그 사람을 내가 작년 부산에 만났었지.
그때 나는 아무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고 9개월 남짓 유지해오던 연인관계도 정리한 상태였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져서 시청역 근처에서 필기시험을 보고선 무작정 예술의전당에 가서 홀로 전시를 보고나서 스타벅스에 앉아 노트북을 켜놓고 있었던 게 생각난다.
그 때의 마음을, 다시 떠올려보니, 참 막막했던 것 같다.
집에 가자니, 가서 할 일이라고는 전 날 헤어진 사람을 떠올리는 일 뿐이었고, 그 집에 있는 내가 너무나도 오래 살아온 그 곳 자체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너무 컸다.
그리고 추석 연휴의 시작이었기에, 나는 더더욱 집으로 돌아가기가 두려웠다.
불편함으로 가득한 아빠와 대면하는 일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나는 또 그 답답한 내 방에 앉아서 잡다한 생각에 빠져서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냥 무작정 어딘가에 가야겠다 생각했고, 바로 직전인 8월 말에 이미 베트남 다낭을 다녀왔기에 나는 국내 어딘가로 뜨겠단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ktx 티켓을 찾았고 대부분 매진상태였다. 나는 순간의 찰나를 노리며 부산행 티켓을 찾았다. 그것도 편도로. 돌아오는 티켓은 나중에 생각하자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만큼 절실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에 난 그 '지인'에게 연락을 했고 내 사정을 간략하게 말했고 그는 연휴 중 이틀정도는 나와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 말 한마디만 믿고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그러니까 여행으로는 가본적 없던 부산에 갔다.
그 길로 집에 가서 여행 간단 말만 남기고 옷만 챙겨서 나왔다.
다시 생각하면, 옷을 챙기러간 그 순간조차도 나는 집에 있기가 거북하고 싫었다.
나에게 그 공간은 이미 죽은 공간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좌석표가 아니라 서서가는 표만 겨우 끊어서 한참이 걸려 부산에 도착했다.
'지인'을 기다렸다. 지인은 나를 몇 년 만에 봤던 것 같다.
이뻐졌다. 라는 말을 듣고서는 그의 집으로 무작정 향했고 그와 나는 참치회에 술을 마셨다.
그렇게 하루를 '아무 일 없이' 보냈고 다음날 나는 또 멍하니 있거나 눈물이 흘렀다.
낮이 되어서 통영 드라이브를 같이 갔다.
밥 한 끼 먹고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돌아왔고 그는 나를 내가 묵을 호텔에 데려다줬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고 그 후로 간간히 그러니까 올해 추석이 오기전까지 서로의 일상을 약간이나마 공유했던 것 같다.
그는 그 사이 여자친구가 생겼고 나는 그 사이 남자친구가 생겼고 나는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
가을이 지나서 다시 연락했을 때 그는 그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나는 오빠와 결혼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난 것이다.
나는 내가 그토록이나 벗어나고 싶었던 부모님 집에서 벗어나, 지금 혼자 방에 있지만 사실은 결혼 할 사람이 곁에 있는 상태에서 나는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상태로 이 글을 쓴다.
그냥 당연하다고 여기던 이 모든 변화가 갑자기 그 '지인'의 바뀐 프로필 사진 한 장으로 생소하게 다가온다.
2020년, 한 해동안 나는 참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어제 밤에 오빠가 한 말이 생각 난다.
"내가 작년에 할머니 산소 다녀오고 나서 00형한테 너를 소개받았는데, 이제 이렇게 결혼까지 했으니까 할머니께 인사드리고와야지. 감사하다고."
맞는 말이다. 나는 그때 부산에 있었다. 부산에서 돌아와서 얼마 안 되 아무런 기대 없이 오빠를 소개팅으로 만나 여기까지 왔다.
나는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지긋지긋한 그 곳에서 탈피했다.
그 사이 회사생활은 나름 우직하게 이어가고 있으며 이제 나는 법적으론 유부녀가 되었다.
이런 변화에 대해 혼자서 이렇게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