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팟 고장

by Minnesota

아무래도 에어팟이 고장난 듯하다.


귀에 착용한 지 30분 정도 흐르면 블루투스 접속이 끊기고 재접속하게 되면


오른쪽 에어팟은 아무 소리도 안 나온다.


출근길에 내가 이 에어팟을 얼마나 오래 썼나 생각해보았다.


2018년 2월 미국 시애틀에 가는 공항에서 당시 남자친구가 선물로 쥐어 준 것이다.


나는 그 에어팟을 받고 미국과 캐나다 벤쿠버를 갔다왔고


돌아와서 얼마 안 되 그 남자와 헤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때 그 사람이랑 좀 더 나은 시기에 만났다면 그렇게 헤어질 인연은 아니었을텐데 싶다.


수많은 거쳐간 인연 중에 손에 꼽는, 그나마 내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 사람은 너무나도 짧게 만나서 기억에 남은게 별로 없다.


주말에 어딘가로 드라이브를 가서 차를 세워놓고 앞에 강물을 바라보며 똑같은 노래를 반복적으로 들었던 기억.


촌스러운 분위기의 경기도 인근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던 기억.


사귀기 전 단계에 갔던 치킨집.


그리고 굉장히 유명하다던 퓨전 일식집.


내가 먹고싶다고 해서 퇴근하고 갔던 떡볶이집.


그리고 당산역 근처의 LOFT 호텔에서의 순간들.


헤어지기 마지막 몇 주간의 고통스러운 기억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만났던 우리회사 앞 폴바셋.


헤어진 당일에 나는 다른 남자와 이태원에 가서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내 연애는 이어져 갔고 위태로웠고 영양가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스쳐지나간 인연일뿐이었고 나에게 남아 있는 기억은 몇 안된다.


그와의 잠깐동안의 만남에서 남아 있는 것이라곤 '애플빠'였던 그가 쥐어준 에어팟뿐이다.


그랑 잘 만났다면 아마 결혼했을 것인데, 싶다.


그가 준 에어팟을 잘 끼고 돌아다녔다.


2018년 4월에 발령을 받고 수원과 부천을 왔다갔다 하는 길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바로 에어팟이었다.


2019년, 퇴사하고 혼자 정처없이 거닐 때 항상 내 귀에 꽂혀있던 에어팟.


2020년, 출퇴근 길에 항상 존재하는 에어팟. 내 회사 사무실 자리에 항상 놓여있는 에어팟.


고장이 난게 틀림 없다. 고쳐서 쓸까 생각해봤지만 보증서를 신혼집에 들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하나 살까 싶기도 하다.


이제 나는 한 남자의 공식적인 아내가 될 사람이니, 에어팟도 새로운 것으로 장만하는게 어떨까 하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결혼 D-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