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추억은 행복입니다.
투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스르르 눈을 떠본다. 새벽이면 타다닥 타다닥 들리는 도마소리에 잠에서 깬다. 분주한 엄마 모습이 보고 싶지만, 마음과 달리 무거운 눈꺼풀은 다시 감긴다. 기분 좋은 냄새와 경쾌한 도마소리에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밖은 이미 밝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새벽에 들려오던 도마소리는 들리지 않고 엄마도 보이지 않는다. 밥솥에 하얗고 뽀얀 밥알들의 고소한 냄새만 가득할 뿐 인기척이 없다. 엄마는 벌써 새벽일을 나가셨구나! 아버지는 어딜 가셨을까?
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장대비에 생각을 던져놓고 빗방울만 쳐다본다. 비 오는 날은 엄마가 쉬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밭일도 논일도 할 수 없는 비가 오는 날 엄마도 아버지도 보이지 않는다.
의지와 상관없이 꼬르륵거리는 뱃속의 굶주린 영혼들은 입맛도 없는 나에게 씹을 수 있는 뭐라도 넣어달라고 여신 북북 거린다. 이른 새벽부터 엄마의 도마소리는 무슨 반찬을 하기 위한 소리였을까, 찬장을 열어보고 냉장고를 들여다본다. 가스렌즈 위 뚝배기에 고소한 된장찌개, 자글자글 잘 볶아진 오징어볶음 식욕 없던 나는 금세 마른침을 꿀꺽 삼켜본다. 생각보다 빠르게 손은 이미 밥통을 열고 주걱 가득 밥을 푸고 있다. 온몸을 자극하는 하얀 밥알 냄새에 마른 배고픔이 밀려온다.
빗소리로 가득한 집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기다린다. 핸드폰도 없는 그 시절 나는 어디에도 연락할 곳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누군가 집에 와주기를 기다릴 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메 뭔 비가 이라고 많이 온다냐" 밖에서 익숙한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지나가는 아줌마 목소리 같기도 하고 여하튼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용수철처럼 튕겨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엄마, 어디를 그리고 갔다 오요?" "막내 일냤냐, 밥 챙겨 묵제" 나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가스 불을 켰고 엄마에게 수건을 갖다 드렸다.
"비옷 어딨 다냐, 느그 아부지 델러 가야써"
"아버지 시방 어딨는디?"
"새벽부터 논물 보러 갔제 이라고 비가 오믄 논물 터줘야제" "나락 다 잠겨 부러 야"
엄마에게 듣게 된 뜻밖의 아버지 행방, 아버지가 새벽부터 논에 물을 보로 갔다고 집에서 1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 먼 길을, 높진 않지만, 산길을 따라 가야 하는 험한 길을 아버지가 가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거글 아버지가 으트게가 이라고 비가 오는디"
"아따 산길로는 못 가제 신작로로 해서 한 바퀴 삥 돌아서 갔는디 시방 그짝으로 오고 있응께 엄마가 먼제 왔제" "비가 이라고 많이 온디 뭔다고 따라와서 시상에 넘어지면 으짤라고 엄마 언능 갔다올란다."
엄마는 챙겨갔던 농기구를 내려놓고 비옷을 챙겨 사라지셨다. 엄마의 걱정은 고스란히 나에게 던져졌고 하늘은 빵구라도 난 것처럼 비를 쏟아부었다. 그 비를 온몸으로 맞고 올 아버지 걱정에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도로를 씽씽 달리는 차들은 물을 튕기며 앞으로 사라져 갔고, 차가 튕기고 간 물인지 빗물인지 우산이 필요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앞을 향해 걷고 있을 때 온몸이 홀딱 젖은 아버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뒤를 걱정스럽게 따르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뭣한다고 나왔냐, 집에 있으랑께, 언능 가자"
"아버지는 우짤라고 거글 갔당가?"
"비 온게 갔제, 물고랑 터져야 나락이 안 자빠지제, 논이 물에 잠그면 농사 망쳐 부러 야"
거세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느껴지는 아버지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 보폭을 맞추며 엄마와 나는 아버지가 한 걸음 뗄때마다 몸과 손을 앞으로 쭉 뻗었지만 이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봄 모내기를 할 때도 가을 추수를 할 때도 내 기억 속 아버지는 만취 상태로 어기적어기적 했던 기억이라 딱히 농사일을 도와줬던 기억은 없다. 남자들도 버겁다는 논. 밭일은 온전히 엄마 몫이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유독 비 오는 날에는 논두렁에 물길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왕복 두 시간이 족히 걸리는 그 길을 다녀오셨다. (산길로 가면 30분 정도 걸렸고, 시골 어르신들은 오토바이나 경운기를 이용했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늦은 아침을 드시는 부모님을 보고 나는 신이 났다.
"엄마 인자 집에 있제, 비가 이라고 온디 어디 가는 거 아니제?"
엄마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엄마 손위로 살포시 내 손을 포개어 엄마 옆에 누워 보았다. 혹여 엄마가 깰까 조심스럽게 엄마 품에 안겨본다. 비에 실려 오는 퀘퀘하고 은은한 엄마 냄새가 달콤하다.
아버지는 쏟아지는 비를 보더니 "막내야, 이라고 비가 오는 날은 김치전 생각 안 나냐?"
"아버지 또 술 자실라고 그라제"
"아따 아니제, 비 옹께 칼칼한 김치전 생각 나서 그라제"
그렇게 말을 꺼내고 아버지는 금세 칼칼한 김치전을 크게 몇 장 부쳐 오시더니 곤히 잠든 엄마를 깨웠다.
"어이 영출어메 인나봐" "새벽부터 힘들었응께 한잔하세"
아버지는 김치전을 쭉쭉 찢어 엄마에게 맛보라고 주셨고, 내 입에도 한 조각 넣어 주셨다.
어찌나 맛있던지 김치를 물에 씻어 먹던 나도 배부르게 먹었다. (사실 나는 그 시절 김치를 못 먹었다. 젓갈 냄새도 싫었고 믹서기에 간 고추 덩어리가 이빨에 끼는 게 싫어서 물에 씻어 먹었다) 잠에서 깬 엄마도 아버지가 권하는 막걸리 한잔 받아 들고 아버지가 건네는 김치전을 마다하지 않고 맛있게 드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는 아마도 아버지의 작은 잔정에 기대어 힘든 시간을 버티며 살아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비 오는 날은 유독 김치전이 생각나고 아버지와 거닐던 신작로 빗길이 생간난다
그 시절 농사를 망치면 먹을 게 없었던 우리 집. 아버지에게 논물 대는 일은 가장으로써 최소한의 책임이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