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배워가는 감정
학기 초 학부모 상담하러 갔을 때 깜짝 놀랐다. 너의 교실 복도 창을 통해 엄마 회사 건물이 훤히 보였고 크게 소리치거나, 손을 흔들면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웠어.
"엄마, 큰일 났어, 미쳤나 봐?"
오후 4시 하교 시간이 되면 종종 걸려오는 전화.
책상에서 고개만 돌리면 길을 걷고 있는 너의 모습이 창밖으로 보인다.
"뛰지 마, 너 지금 뛰는 거 다 보여"
"흐흐흐, 알았어, 엄마 나 진짜 미쳤다니까?"
"그러면 진정해야지, 정신 제자리로 돌려"
천천히 창문 쪽으로 옮겨 너의 모습을 지켜보며 통화를 이어갔다.
가뿐하게 뛰는 모습, 경쾌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미쳤다고 하는 표현이 나쁜 일을 암시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너는 가끔 하굣길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속사포처럼 들려주고 버스를 타지.
그 억양과 텐션에 따라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데 오늘은 좋은 일 같더라.
천천히 너의 숨소리, 목소리에 집중했다.
엄마, 중간고사 점수가 나왔는데 "진짜 레알 믿을 수 없어"
네가 생각해도 놀라운 점수를 술술 이야기하더니 잠시 말을 멈추고 엄마, 수학이랑 영어는 그냥 빼자!
나도 모르게 호탕하게 웃었다. 듣지 않아도 느껴지는 점수 ㅋ
"반 평균 깎아 잡수셨구나"
"그래도 엄마, 100점이 있다는 게 어디야, 국어는 열심히 했다고"
공부는 불행한 인생이라며, 학교 시스템과 시험이라는 단순한 교육제도를 비판하고 성적 스트레스로 청소년 자살률이 늘어가는데 왜 어른들은 모른 척하고 있냐며, 작년 이맘때 너를 마중 나온 엄마를 보자마자 어두운 집 앞에서 한참 동안 너의 분노를 표출했던 거 기억나? 엄마는 잔뜩 화가 난 네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중학생이 되면서 시험에 대한 부담감을 너의 부정적 감정으로 똘똘 뭉쳐 스스로 시험을 포기하겠다고 했고, 흔들리던 감정이 초조함이 되어 방구석으로 몸을 들이밀었잖아.
그 두려움은 경험한 적 없는 낯선 기분이고, 익숙하지 않았던 상황에 대한 어색함이 두려움이란 감정으로 다가왔을 텐데, 엄마는 불안한 네 감정을 살피기보다 방황하는 네 마음을 어떻게라도 잡아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낯선 감정에 자꾸 발을 빼는 모습에 안타까워 잔소리와 짜증으로 목적 없는 대화만 이어갔지.
마음이 온통 흙빛인 너를 사회 통념으로 이기려 했던 엄마가 엄마 욕심을 내려놓은 건,
중간고사 대비 주말 보충 수업을 회피하고 마지못해 가방을 챙기던 너의 우울한 뒷모습 때문이었단다.
똑똑하고, 당찬 너에게 그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던 엄마의 욕심, 할 듯 말 듯 주저하는 너를 꽉 잡아줘야 했는데 엄마는 매번 타이밍을 놓쳤어, 그래서 미안했고 너의 방황이 엄마 잘못처럼 느껴졌어.
학원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 않지만, 엄마에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단다. 엄마 마음속 불안을 네가 학원 가서 공부하는 모습으로 위안 삼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서야, 정말 너에게 필요한 게 뭘까 생각했단다. 너는 학원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꾸역꾸역 학원을 가야만 하는 현실을 엄마가 선물하고 있더라,
네가 불행하다는데, 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더 이상 외면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학원을 다 정리했단다. 사실은 그때 엄마도 너랑 같은 불안한 마음이었어.
여보, 어제 친구들이 자식들 학교 성적 얘기하는데, 다들 걱정이 많더라고,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듣고만 있었어. 우리 별이 학원 안 보내고 그냥 이렇게 지내도 돼?
여보, 우리 딸은 뭐라도 할 아이야, 그냥 믿어!
그래도 돼?
응? 그래도 돼!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든 할 용기도, 끈기도, 열정도 있는 아이야, 당신 닮았잖아!
음~
어제저녁 아빠와 엄마가 나눴던 대화야, 아빠 머릿속엔 별이에 대한 걱정과 염려와 기대가 가득하더라.
엄마는 아빠에게 아빠 삶을 살라고 했어, 너희가 어릴 때 운동에 대한 아빠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니?
기억하지? 새벽에는 수영하고 주말에 쉬지도 않고 파주까지 베드민턴 레슨 받으러 다녔던 아빠 모습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투지를 불태우는 아빠에게, 잠시 멈춰둔 열정을 다시 꺼내라고 했어, 엄마도 마찬가지로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너도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해.
딸, 앞으로 겪게 되는 감정의 혼란도, 익숙하지 않은 어색함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이라 생각하면 좋겠어,
시간과 경험 앞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너의 자산이 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면 훨씬 마음이 편해질 거야.
시험공부를 포기하고 손을 놓았던 네가, 무슨 이유로 공부했는지, 그 결과가 네 상상을 뛰어넘어 느끼는 그 감정도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이지만 불안보다는 긍정의 좋은 감정이지?
시험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네 노력으로 긍정의 감정으로 바꾼 거야, '기억은 감정의 강도'라고 하더라.
스스로 느낀 너의 성취! 그 감정의 강도가 네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 에너지와 정신이 될 거란다.
엄마도 여전히 불안한 감정에 서툴지만, 불안한 감정이 느껴지면, 낯선 경험이고 어색한 감정이라고 먼저
정리하고 긍정적으로 감정을 바꿀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해.
오늘은 너를 통해 두려웠던 엄마로서의 감정이 믿음이라는 긍정 감정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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