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ju and FIRST PERSON SINGULAR, 2020
a.
겨울 경주의 찬 바람은 고약하게 매서웠다. 하지만 그 바람 사이에서도 능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편안해지고 담담해진다.(물론 아이폰을 들고 있는 손등은 추운 바람 때문에 갈라질 정도지만)
p.15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 그녀가 말했다. 벽에 적힌 글자를 낭독하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구나." 내가 감탄해서 말했다.
b.
겨울에도 자전거가 많이 다닌다. 동네 책방에서 아껴두었던 하루키의 소설 '일인칭 단수'를 샀고, 동네서점 에디션인지라 인터넷에서 보던 것과 다른 커버라 기분이 좋았다. FIRST PERSON SINGULAR라는 영문명이 쓰여진 2021년 다이어리도 기념품으로 받았다. 2021년엔 한 단어라도 매일매일 적어봐야지 하는 연말다운 결심을 했다.
p.48
내가 말한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c.
'저기가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올라간 능이려나..?'
산책하는 내내 조금만 덜 춥고, 여유가 많다면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공간이란 생각만 들었다.
p.87
팝송이 가장 깊숙이, 착실하고 자연스럽게 마음에 스미는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로 그런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팝송은 그래 봐야 그저 팝송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저 요란하게 꾸민 소모품일 뿐인지도 모른다.
d.
능이 가지고 있는 곡선미는 탁월할 정도로 우직하고 풍만하다. 빙 둘러보다가 또 반대편으로도 돌고, 첫날밤은 황남빵 한 박스를 포장해 들고, 그렇게 계속 밤 산책을 하며 걸었다.
p.147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 -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e.
어딜 가나 능이 곧 보이고, 조용한 사람들이 사는 곳. 삶과 죽음이 마치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 공간. 아등바등 지쳤을 때 경주는 여전히 처음으로 생각 나는 곳이다.
2020년 12월 3일에 경주에 올 수 있어서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p. 223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 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 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한쪽을 택하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오히려 많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항상 스스로 선택해온 것도 아니다. 저쪽에서 나를 선택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