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만큼 시간의 향기를 담을 수 있는 예술이 있을까. 우리 누구나 건축물에서 살고, 건출물에서 일하며, 건축물을 스쳐 지나간다.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건축물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 어쩌면 건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완성되는 걸지도 모른다. 건축물을 설계할 때 혹은 공간을 설계할 때 그곳에 머무는 사람을 고려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가 '공간의 역사'가 되고, 사람들의 기억이 '공간의 기억'이 된다. 때문에 하나의 공간이라 하더라도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에 의해 무수히 다를 수 있다. 또한 건축은 우리 삶의 영역과 함께 하기에 다른 예술에 비해 완성된 이후 한 사람 한 사람이 느끼는 경험이 비교적 자유롭게 펼쳐진다. 그렇다면 공간을 느낀다는 것은 혹은 기억한다는 것은 상당 부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감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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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작가 스스로도 공간을 방문한 의도나 시간에 따라 다른 인상을 가지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때문에 이 책의 작가의 인상과 나의 인상이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예로 그는 광화문광장에 대해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시간 속에 놓인 광화문을 본다. 때문에 서울 한복판의 섬처럼 남아 사람들의 쉼터로 적합하지 못한 광화문광장을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런 도심 속 섬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사무실에서 잠시 나와 광화문역의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오른 편으론 고층 빌딩으로 가득해 시야가 가려지는 도심의 한복판이고, 왼편으론 경복궁과 그 뒤로 펼쳐진 산자락이 펼쳐져있다. 이런 오른쪽과 왼쪽의 이질감 사이에 오랜 시간 자리를 떠날 수 없는 세월호 유가족, 그리고 더 오랜 시간 장애인 등급제를 반대하며 농성 중인 장애인 단체가 있고 그들 사이로 젊은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말을 건다. 이질감과 다양한 소수의 의견이 머무는 이곳은, 언제나 섬처럼 떨어져 잠시 일상의 흐름 속에 놓쳤던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때문에 나에게 광화문광장은 가끔씩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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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을 설계한 건축가 이소진은 기존의 낡고 허름한 건물을 윤동주 문학관으로 설계할 계획을 세우면서 "그들의 '마음의 풍경' 속에는 이 건물이 품고 있는 '시간의 가치'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라고 고백한다. 그녀가 말한 '시간의 가치'라는 것은 어느 한 개인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스쳐 지나간 모든 사람이 함께 만들어 가는 가치일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공간들을 다시 한 번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이뤄지었을지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서울 속에 내가 담아두었던 '시간의 가치'를 하나씩 생각해보았다. 서울에서 일생을 살아온 나는 이곳이 너무나 빨리 변한다고 불평불만 해왔다. 하지만 도시 서울이 그렇게 빨리 변한 이유는 우리가 그곳에 담긴 기억을 함부로 여기고 너무 빨리 달려만 왔기 때문은 아닐까. 서울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더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