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랑 이상하게 사이가 좋았다. 애쓰지 않아도 늘 가까이에 있었던 것 같다. 운이 좋게도, 엄마를 따라 읽기 시작한 것 같다. 사실 어릴때 나는 얌전한 아이가 아니었다. 딸이라고 하기엔 매우 아들처럼 컸다. 얌전히 무언가를 하는게 익숙하지 않을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환경자체가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실 책이랑 거리가 있었다. 엄마를 따라다니고, 언니를 따라다니면서 책과 친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의 나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려서 나는 경상북도의 구미에서 나고 자랐다. 이제 성인이다 라고 말하게 된 때까지는 그곳에서 지냈다. 내가 아주 어렸을때 살았던 동네에는 처음에 내가 살던 아파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이 다 논과 밭이었고, 공장 몇개가 전부였다. 학교를 가려면 학원버스나 부모님의 차로 이동을 했어야 했고, 걸어서는 그 어린 나이로 편도 한시간은 족히 걸릴 정도로 거리가 있었다. 학원차나 부모님의 차를 타지 못할때는 한번씩 걸어다녔는데, 때마다 논이나 밭에서 한참을 장난치고 놀았던 것 같다. 지금은 하지 못할 일인데, 그때는 참 겁이 없었나보다.
논과 밭이 놀이터였고, 뒷산과 저수지가 테마파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파트 단지 중앙에 큰 유치원겸 음악미술학원이 생기고 그곳이 놀이터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공사장과 저수지, 뒷산 같은곳에서 놀았던 것 같다. 아파트 전체가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좋았다. 숲으로 잔디로 둘러쌓려있었고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많아서 순식간에 놀이터가 되어주었으니까. 그런 탓이었는지, 어쨌는지 남자아이들과 뛰어노는 일이 많았다. 공사장에서 놀았다고 하면 말 다했지뭐. 그래서 사실 책이랑 친해지기가 더 어려웠다. 근처에 도서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언제쯤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언젠가부터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버스가 아파트로 오기 시작했다. 버스안에는 책이 가득했고,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 버스가 왔던 것 같다. 엄마가 그 버스에서 책을 빌려보기 시작하면서, 어린나이에 엄마가 하는 건 죄다 따라 하고 싶어했던 덕분에 나도 같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집중력이 오래가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엄마가 책을 읽으면 옆에서 꼭 따라했다. 그렇게 책과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또, 가끔이라고 해야할지 자주라고 해야할지 같은 구미안에 있었던 외갓집을 가서도 언니 동생들이랑 꼭 도서관에서 놀았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조금씩 자라면서 도서관 말고는 딱히 갈 곳도 없고, 갈 일도 없어서 그곳이 놀이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책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당연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책과 친하다고 해서,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정말 말 그대로 책이랑 친했다. 뭐 그렇다고 얌전하게 성격이 바뀐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운동과 관련된 것들을 좋아해서 뛰어노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서는 조금 더 바깥으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이사를 나온 곳에는 이제 박 건물들을 짓기 시작하는 동네여서 대부분이 공사장이었고, 더 갈 곳은 없어졌다. 학원을 가거나, 체육관을 다니고 그 외에 거의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낸 것 같다. 도서관이 가까워져서 더이상 차로 오는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고, 도서관까지 걸어 다녔던 것 같다. 엄마 손을 잡고 도서관에 가는 일이 너무 좋았다. 엄마가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어렸을때 엄마와 함께 한 기억이 도서관이었다. 엄마랑 다녔던 곳이 도서관이어서였을까, 그 나이대에 맞지 않게 도서관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중학교때는 도서관 바로 위에 위치한 학교를 다녀서 자연스럽게 더 자주 다녔다.
책을 읽고, 도서관에 가는 것 말고 나는 피아노를 치기를 좋아했고,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검도를 나름 오래 배우기도 했었고. 아빠의 반대로 피아노를 접고,(지금 생각해보면 어차피 진학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좋아했지, 잘 한건 아니었기 때문에) 인문계 고등하교에 진학하면서 부터 더이상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학업에 매진을 하기도 해야했고, 동아리 활동으로 까지 책과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중학교때 동아리 활동으로 합창부에서 활동을 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밴드부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이없는 이유로 마지막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왠만한 동아리는 다 인원이 차서 친구의 추천으로 도서부원이 되고야 말았다.
책이랑 뗄 수 없는 관계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움직이는 데 마다 책과 도서관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도서부원은 진짜로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학생들의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도서부원이 된다는 것이 뭔가 나쁘게 말하면 범생이 같다고 해야하나.. 그런 이미지가 있어서 다들 꺼려했고, 나 역시도 도서관과 책은 좋아하지만 그걸 굳이 동아리 활동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디션을 보는 동안 다른 동아리는 다 인원이 차 지원이 불가능 해졌고, 선택의 여지가 몇개 없었는데 그중에 도서부는 봉사점수 60시간을 채워준다고 해서 그것 하나보고 들어갔던 것 같다.
생각했던 것과 도서부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이런말을 하면 학교를 욕보이는 일이 될 지 모르겠지만,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새로 만들어진 학교이자, 만들어지자마자 인문계에서 실업계로 바뀔 위기에 있었던 학교다. 다행히 우리 바로 윗선배와 우리학년의 학생들 덕분에 학교의 이미지가 바뀌고, 지금은 구미에서 나름 명문 고등학교가 되어있더라. 어쨌든 생략하고, 처음 도서부원으로 들어갔을 때 일은 좀 충격적이었다. 앞서서 주구장창 얘기했지만, 나는 책과 도서관을 좋아했다. 좋아했다는 말은 단순히 왔다갔다하고 책을 잃은게 아니라, 그 분위기 자체를 좋아했다는게 되겠다. 고등학교의 도서관이 초등학교 도서관 보다 못했다. 무슨말인고 하니 앞서 설명한 우리 학교는 공부와 거리가 좀 있었다. 물론 내가 입학하기전에 조금 분위기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게 완전히 벗어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새 학교에 새 도서관 새책. 분명 다 새건데 도서관의 책은 너덜너덜했고, 도서관 안에서 피구, 족구는 기본이고 가끔은 야구. 얼음땡이라는 잡기놀이까지. <???>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했다.
학교의 도서실을 좋아했던 것도, 도서관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대출만 대충 해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것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책 대출을 해주는 컴퓨터에는 야동이 가득했고, 고등학교 임에도 분실된 책이 대부분이었으며, 대출은 모양새만 가지고 있었을 뿐 사람들이 허락없이 책을 가져가 던지고 찟기고 어느 순간 남는게 없었다. 새로운 책이 들어와도 금새 사라졌다. 충격적이었다. 고등학생인데. 무려 고등학생인데. 내가 생각하는 도서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도 오랜시간 함께한 친구들이 있었고,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대충 봉사점수만 받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했던 것 같다. 보직에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2학년이 되었고, 초등학교때부터 친구였던 친구가 도서부장이 되었다.
도서부를 그만두려고 했으나, 함께 하자는 설득에 남아 계속 하기로 했다. 다만 이제는 진짜 도서실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기도 했던 것 같다. 1학년때는 아무래도 힘이 없고, 3학년때는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으므로 2학년이 제일 힘이 셌기 때문이기도 했다. 후배들을 면접을 통해 뽑았고, 도서관은 새로 오픈되었다. 대출 장부를 명확하게 하기로 했고, 책의 회수도 원만해 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책은 사라졌고, 이상하게 생각한 나는 친구들의 얘기에 기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도서부장과 차장이 새책을 빼돌려 집에다 개인소장을 하고 있었고, 들리는 소문에 야자시간에 도서정리를 한다는 거짓 보고를 한 뒤 도서관에서 온갖 추잡한 짓을 미성년자가 하면 안되는 짓을 다 했다고 하더라. 그걸 듣고 화가 치밀어 도서부를 그만 두려고 했다. 그냥 넘길 수 없어서 선생님께 다 보고를 한뒤, 그만 두겠다고 했다. 책을 사랑하지만 도서부 일에 관심이 없던 선생님은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선생님의 오랜 설득 끝에 그 친구들 대신 내가 도서부장이 되고 말았다.
진짜 지금 생각해도 나는 개또라이였다.
도서관을 자신들의 개인 놀이터로 쓴 오래된 친구들을 한방 먹이고, 한자리 차지한 파렴치한으로 소문이 났다. 학교는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기 가장 좋은 곳이었다. 내 소문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모르겠지만 배신자로 낙인 찍히는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라이다.
도서관에서의 일체 공놀이를 비롯한 일들을 하지 못하게 했고, 목소리가 유난히 컸고 성격이 더러웠던 나는 선배고 나발이고 도서관에서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시 권력을 행사했다. 조금씩 도서실이 진짜 도서관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힘이없던 도서부에 힘을 실었다. 도서부장이 되기까지의 몇달의 기간동안 나는 친구도 버린 배신자에 선배들 욕먹인 날 것 그대로의 이빨을 드러낸 이미지가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