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쫄딱 맞은 일상여행

우산 도둑, 무사하신가요?

by maudie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얼마 만에 만난 친군지 모르겠다. 각자의 현실에 부딪혀 살아내느라 시간이 없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예전보다는 훨씬 여유로워진 지금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자주 보지 못했다. 아주 오랜만에 갑자기 만나기로 하고 잔뜩 설레었다. 꽃이 필 무렵이어서 멀리는 아니더라도 꽃놀이를 갈까 고민을 하던 중에 주말에 비가 온다는 소식과 여러 가지의 이유로 포기를 하고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언제나처럼 우리는 아침 일찍 만났다.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조금 늦게 만난 게 오전 10시였다. 이른 시간에 만난 탓에 배가 고프지만 우리는 먼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아침 일찍부터 사람이 많아 자리가 없었고, 다행히 비가 오기 전이라 야외 테이블에서 마시기로 하고 커피를 사서 나왔다. 이런저런 넋두리를 하다 보니 오전 시간이 다 가고 아침 겸 점심으로 샐러드를 먹고 약간의 쇼핑을 하고 우리는 홍대로 넘어갔다. 비가 오기 시작했고, 우산을 두고 간 탓에 친구와 작은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걷기로 했다. 우산을 살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래 걸을 것이 아니니 사지 말자고 했다. 그렇게 불행은 시작되었다. 쇼핑한 것들은 무게가 있으니 사물함에 두고, 우리는 9번 출구로 나가기로 했다. 9번 출구 - 그릭 요거트 - 지브리 샵 - 서점 - 카페를 순서로 움직이기로 했다. 우산은 작았고, 머리만 안 맞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첫 번째로 그릭 요거트 카페를 갔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지만, 운이 좋게 앉아서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릭 요거트는 목이 꽉 막힐 정도의 뻑뻑함이었고, 물도 음료도 판매나 제공하지 않아서 다 삼키기가 힘들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목이 막혔다. 꾸역꾸역 삼키고, 급히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우리는 비가 많이 오기 시작했기에 얼른 두 번째로 지브리 샵을 가기 위해 나섰다. 우산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를 맞으며 겨우 근처까지 갔는데, 이상하게 지브리 샵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샵이 폐점을 한 모양인지 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았다. (평소 만나면 구경삼아 한 번씩 방문했었음)


그렇게 허무해진 마음을 뒤로하고 비를 피하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겨 늘 가던 동네서점을 갔다. 가는 길에 보인 경의선 숲길의 벚꽃길은 너무너무 예뻤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만큼 너무너무 예뻤다. 안타깝게도 비가 많이 온 탓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얼른 들어가야만 했다. 우리가 가던 동네서점은 사실 서점이라기보다는 편집샵에 더 가까웠다. 주력상품이 책이 아니기도 했고, 다른 예쁜 것들이 참 많았다. 반지층은 팝업스토어를 하는 곳이었고, 나머지는 편집샵에 맞게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건물의 가장 위층에 독립출판사의 책들이 다양하게 준비되어있었는데, '어라..... 왜 책들이 군데군데 내려와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게끔 층마다 조금씩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혹시 판매하는 책의 종류를 늘리거나, 더 많은 책을 판매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란 기대를 잔뜩 하고 한층 더 오르려는 순간, 늘 책이 있던 공간은 직원들만 출입 가능하다는 안내문구만이 우리를 반겼다. '어라 이게 뭐야....? 이러면 안 되잖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직원에게 물었더니 이제 서점은 운영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는데 허망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왔는데, 홍대를 오면 항상 꼭 들르는 아주 좋아하는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없다고 한다.


충격이었다. 생각보다 다소 많은 충격이었다. 앞서 지브리 샵은 사라졌고, 비는 잔뜩 맞았고, 그 와중에 좋아하는 공간의 충격적인 변화에 당황스러웠다. 허무해졌다. 용산에서 그대로 머물걸 괜히 홍대로 위치를 옮겼나 할 정도로. 너무 아쉬웠다. 우리는 다리가 풀린 채로 우리는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그. 런. 데. 분명 들어오면서 우산들이 잔뜩 세워져 있던 입구에는 감쪽같이 모든 우산이 사라져 있었다. 물론, 사람도 우리가 들어올 때 있었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남아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그 많은 우산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쓰고 온 우산도 사라졌다. 젠장! 우산이 아무리 찾아도 없다. 혹시나 해서 다른 곳도 다 찾아봤지만, 없다. 둘이서 우산 하나를 쓰고 왔고, 심지어 그 우산은 한쪽의 살대가 부러져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과 구분이 안된다고 하기엔 너무 달랐다. 비슷한 우산이 하나도 없었다.


순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편의점을 가서 우산을 사 오자는 친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에 편의점도 없었고, 그 편집샵에서 우산을 사자니 질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대로 비를 맞고 내려가기로 했다. 어차피 카페도 멀지 않으니 그냥 카페로 바로 자리를 옮기자고 하고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비는 점점 더 쏟아지고, 카페는 생각보다 멀었다. 그리고 편의점 역시도. 카페에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한 골목을 더 가야만 했다. 편의점도 하나를 지나쳤다. 친구가 한참 고민을 하더니 우산을 사야겠다고 했고, 우리는 편의점으로 돌아가 우산을 하나 사서 나왔다.


친구가 입고 온 옷이 니트여서 최대한 비를 맞히지 않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나는 다 젖어버려도 친구에게 우산을 최대한 다 씌워줬었는데, 노력이 다 소용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친구는 생쥐꼴이었다. 물론, 나도.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서 나와한 블록을 더 가 카페를 들어갔다. 이 카페는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참 사연이 많은 곳이었다.


예전에 정말 좋아했던 남자 친구랑 카페 앞에서 다투고, 엉엉 울다가 들어가 커피를 마셨던 일도 있었고, 썸남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바람 맞고 혼자 커피를 마신 일도 있었던 슬픈 공간이기도 했다. 친구와의 약속이 파투가 나서 혼자 기다리다 커피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하지만 커피 맛이 워낙 훌륭해서 꼭 들르는 곳이었고, 일부러라도 들르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산 도둑을 만나 비에 쫄딱 맞은 생쥐의 꼴을 하고 오다니. 참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우산 도둑에게, 쏟아지는 비에. 잔뜩 테러를 당한 우리는 지친 몸과 마음으로 도착한 카페 앞에 우산을 세워두고 다시 드리우는 불안한 마음을 지우고 안으로 들어섰다. 카페는 사람이 많았고, 창가에 바 자리만 남아있었다. 우리는 겨우 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싱글 오리진을 아이스로 두 잔 시키고 넋을 놓고 앉았다. 그때부터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또다시 우산을 도둑맞을까 봐 우산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커피 맛이 집중이 전혀 되지 않았다. 사실, 이곳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홍대로 넘어온 것인데.


친구도 나도, 커피를 참 좋아한다. 하루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커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자주 마시는 것이기도 하고, 맛이나 향에 민감하기도 한 편이라. 어쨌든 이 친구를 데리고 처음 그 카페에 갔을 때, 친구도 나도 커피의 맛과 향, 그리고 카페의 분위기에 잔뜩 취했다. 핸드드립 커피 치고 굉장히 진한 편이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오래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무슨 사연이 있을 때마다 방문을 하곤 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커피가 좋아 기분이 나아졌을 정도니.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커피의 맛과 향이 이전과 달랐다. 느끼지 못한 잡다한 맛이 느껴졌고,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기운 없이 커피를 마시고 쉬었다. 내내 우산을 또 도둑맞을까 긴장한 상태로. 그렇게 앉아 쉬다가 우리는 다시 용산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오늘의 홍대는 가는 곳마다 실패를 맛봤기 때문에, 얼른 자리를 옮기고 싶었다. 우리는 카페를 나서 용산을 가기 전에 AK를 들렀다 가기로 했다. 그곳에 생긴 편집샵 팝업 스토어를 들러 구경을 하다가 북마크 몇 개를 구매한 뒤 전철을 타러 내려갔다. 전철을 타기 전에 짐을 다시 찾고 바로 용산을 가기로 했다.


전철역사 안으로 들어가 짐을 찾으러 가기 전에, 꽃집을 만났다. 커피만큼이나, 책만큼이나 꽃을 유난히 좋아하는 친구와 나는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멍하니 보고 있다가, 친구가 엄마께 선물로 준다며 프리지어를 사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에게 선물하는 꽃으로 노랑과 중황이 섞인 자나 장미를 선택했다.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야. 너도 골라봐! 내가 사줄게." 친구는 내게 꽃을 선물해주고 싶다고 했다."아냐.. 나는 괜찮아." 집까지의 거리도 상당했고, 비를 쫄딱 맞기도 했고, 여전히 비도 오고 있었기 때문에 아쉽지만 거절했다. 너무너무 예쁘고 감사하지만 가지고 갈 여유가 없었다. "짐이야? 짐? 지금 꽃이 짐이야? 꽃인데?" 그 말에 그래.. 꽃인데 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별 튤립과 델피늄을 선택했다.


친구는 내가 선택한 꽃을 한참 보더니, 델피늄을 보며 "저 꽃은 무슨 꽃이야?" 하고 물었다. 그래서 "델피늄이야, 꽃말은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라고 답했다. 친구는 꽃이 참 예쁘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는 내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얼굴로 꽃을 선물해줬다. 너무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우리는 용산으로 돌아와 추운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따뜻한 칼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지막으로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참 기분 좋고 설렜었는데, 홍대로 자리를 옮긴 후부터 영 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해줬다. 이렇게 힘들었어서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고. 우리가 간 여행 중에, 우리가 함께 한 순간 중에 역대급이었다고. 그 말에 동의한다. 뜨는 해를 보겠다고 정동진에서 밤을 꼴딱 새우고, 기차를 잘 못 선택해 빙 돌아 4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차를 타고 돌아왔던 그 날 보다도 힘들었던 것 같다. 그날도 우산이 없이 비가 쏟아져 난감했었는데. 그날은 그래도 운이 좋게 지나가다 우산을 빌려주신 분 덕분에 비를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그날보다 오늘이 진하게 남았다.


이제 다시 일을 구하고, 백수에서 벗어날 준비를 해야 해서 당분간은 만나지 못할 테지. 아쉽기만 한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진한 추억을 남길 수 있어서 역시 좋았던 것 같다. 아 근데 아무리 그래도, 독립출판 서적을 다루던 공간 없어진건 진짜 슬펐다. 다음엔 그냥 종종 언급했던 대전 '다다르다'에서 만나자고 해야겠다.










( 아, 참. 3월 27일 홍대 어느 편집샵에서 우산을 훔쳐가신 분.. 혹시 무사하신가요? 저희가 굉장히 진하게 저주를 했어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본인의 잘못이 크니 이해하기 바랍니다. 혹시 무사하지 못 한 하루를 보내셨다면, 그걸로 용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저주를 했냐고요? 그 부러진 우산이 뒤집혀 쫄딱 젖어라, 지나가는 트럭이 물을 튀겨서 마치 우산을 안 쓴 것처럼 쫄딱 젖어라. 뭐 이런 정도예요. :- ) 남의 것은 함부로 가져가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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