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사랑한다는 말 대신
나이가 들면 서운한 게 많아진다는 엄마의 말, 왠지 그 말이 더 서운하게 들리는 밤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나의 절친이셨다. 나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일찍이 돌아가셔서 나에게는 외할머니가 할머니이자,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셨다. 외할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이 그냥 할머니라고 불러왔고, 함께 살진 않았지만 자주 만났다. 멀지 않은 곳에 할머니가 계셨고, 언제든 나를 보러 오셨다. 할머니랑 함께 하는 시간은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논과 밭, 산이 다 가까이에 있었는데 할머니를 만나면 늘 그곳에서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녔다. 꼭 보물찾기 같았다.
계절마다 새로운 보물을 만나 늘 할머니를 쫓아 이곳저곳을 다녔던 것 같다. 그렇게 나물도 뜯고, 열매도 따고. 보물 찾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꼭 칼국수를 만들어 주셨다. 나는 그 칼국수가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들 중에 가장 맛있었고, 정말 잘 먹었다.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늘 먹고 싶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만큼, 할머니가 직접 반죽해 밀어 만들어 주신 칼국수는 정말 어떤 것 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밖에서 사는 칼국수와는 끓이는 방법부터 달랐다. 걸쭉한 칼국수가 정말 부드럽게 넘어간다. 신기하게도 할머니 칼국수와 비슷한 칼국수는 여태껏 먹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할머니에게도 칼국수는 잊을 수 없는 음식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드는 일이 있었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구미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왔다. 가족이 모두 이사를 온 지는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나는 직장을 따라 고양시로 이사를 나갔고, 스케줄 근무를 하는 탓에 쉬는 날 집에도 올 시간이 없었다. 하나 있는 남동생은 사근사근한 성격도 아니고, 가정을 꾸리고 서울 인근에서 살고 있다. 각자의 사정으로 우리는 할머니를 뵈러 구미를 가는 일이 점점 없어졌다. 할머니는 내내 보고 싶다고 언제 오느냐고, 할머니가 해주는 칼국수가 먹고 싶지 않냐 물으셨지만, 늘 조만간 뵈러 간다는 말만 하고 가지 못 했다.
할머니가 늙는다는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그냥 늘 같은 자리에 계실 거라고. 그러다 나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자취방을 정리하고 본가로 돌아왔고, 결혼 상대였던 사람의 폭력적인 모습이 드러나면서 파혼을 하게 되었다. 뱃속에 있던 아가도 하늘로 가버리고, 한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다. 증손주가 처음 생긴다고 좋아했던 할머니는 쓰러질 듯 펑펑 우셨고, 나는 너무 죄송했다. 할머니는 그래도 잘했다고, 언제든 힘들면 할머니한테 오라고 하셨다. 알겠다고는 했지만, 할머니를 찾아 뵐 용기가 없었다.
유산을 한 탓에 몸은 점점 나빠졌고, 잘 먹지 못 했다. 그 와중에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칼국수가 너무 먹고 싶었다. 할머니를 뵈러 가자고 가자고 엄마를 졸라도, 무서운 속도로 번지기 시작한 코로나 탓에 약해진 몸으로 어딜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거진 1년 가까이의 시간이 더 흘렀다. 중간에 전동 킥보드에 치는 사고로 한 달 동안 입원을 하고, 끊어진 인대 탓에 재활을 한다는 핑계로 시간이 더 지났던 것 같다. 그러다 할머니 생신이 다가왔다.
할머니는 종종 전화를 하셔서는 내내 우셨다. 내가 아픈 동안, 할머니도 몸이 점점 나빠지셨고, 살아있을 때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코로나가 물러가길 기다리기엔, 할머니의 우울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할머니 몰래 엄마와 함께 할머니를 뵈러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해 엄마 차를 타고 구미로 향했다. 4시간 반이 걸려 할머니를 뵈러 구미에 도착하고 나서,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이제 곧 댁에 도착한다는 말에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고, 괜히 죄송한 마음에 아팠다. 할머니 댁에 도착하니 할머니께선, 불편한 몸으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려고 한참 추운 밖에서 기다리시고 계셨고,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동안 안 그래도 작았는데, 더 작고 야윈 할머니를 품에 안았다. 할머니는 왜 이렇게 오랜만이냐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나를 올려다보셨고, 울컥한 마음에 나는 할머니를 더 꽉 안았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보기 힘들었던 손녀 딸내미 뭐라도 먹이고 싶으셨는지, 보이는 대로 꺼내 놓으셨다. 할머니 댁에 도착하고부터 한두 시간 내내 할머니는 ‘이것 좀 먹어봐라.’ 고만하셨다. 그리고는 내내 “할미 집에 오지도 않는데, 할미 집에 잘 오지도 못하는데. 할미가 아파서 국수도 못 말아줘서 어쩌지 우리 아가, 내가 국수도 못 말아줘서 어떡하지..” 그 말에 그만 울컥했다. 할머니는 아직도 여전히 내내 어렸을 때부터 구미에 살았던 내내. 성인이 되어서도 툭하면 “할머니 국수 먹고 싶어, 할머니 국수 해줘. “하고 엄마 없이도 혼자 자주 할머니 댁에 쫓아갔던 그때의 나를 선명히 기억하는 듯했다. 그게 뭐라고.. 사실 할머니 국수가 먹고 싶다는 핑계로 할머니를 뵈러 간 거긴 했지만, 그걸 그저 칼국수가 먹고 싶어서였다고만 기억하시는 듯해서 조금 슬펐다.
사실, 온 가족들이 다 친하긴 했지만, 경상도 사람들이어서 그래서였는지 상당히 무뚝뚝하고, 애교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유독 나만 할머니께 자주 전화하고, 애교도 부리고, 칼국수가 먹고 싶다는 핑계로 할머니 댁에 가서 자고 오곤 했다. 그때의 나를 기억하시고, 내내 칼국수를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만 하셨다. 할머니와 외식도 하고 오래 있지는 못 하고 아쉽게 돌아와야 했는데, 헤어지기 전까지도 내내 칼국수를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말씀만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돌아서 오는 차에서 한참을 울었다.
할머니는 이제 칼국수를 만들어 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몸이 언제고 괜찮은 때에 다시 만날 수 있으면, 그때는 꼭 칼국수 해 놓을 테니, 꼭 오라고 하셨다. 하지만, 왠지 할머니가 해주신 콩가루로 반죽해 만든 그 칼국수를 다시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의 칼국수는 어린 시절 친구였고, 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핑계였고, 할머니께서 기억하는 유일한 선물이었고, 할머니 그 자체였다.
할머니는 이제는 칼국수를 만들어 줄 수 없을 거라고, 내가 맛있게 칼국수를 먹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서운해하셨는데, 할머니의 건강이 괜찮아져서 다시 할머니 칼국수를 먹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할머니 국수 먹고 싶어요.’ 하고 괜히 한번 더 할머니 보러 갈 수 있게. 핑계가 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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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 푸드에세이 공모전에 도전했던 이야기 입니다. 정말 생각나는 날 것 그대로 도전을 했던 터라, 사실은 기대를 하면 안되는데 괜히 기대를 했던 이야기에요. 오늘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뚜기 푸드에세이 공모전 발표가 있었어요.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합격을 못했네요. 그래도 도전에 의의를 두려고 합니다. 똑같은 제목인 '할머니의 손칼국수'라는 이름의 글이 당첨되신 분이 있더라고요. 놀래서 한참을 봤네요. 아쉬운 마음에 다시 보고, 다시 보고.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으면 조금 오래 생각하고 써야겠어요. 그래도 괜히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