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다.

참 슬프게도 여전히 마침표가 찍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by maudie

나는 나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아주 지독한 사랑을 했었나 보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또 너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게 드라마든, 영화든, 심지어는 문장이든. 어떤 생각의 영역을 얼마나 네가 차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조차도 알기 쉽지 않다. 네가 차지한 영역이 그 얼마나 넓고 깊은 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아주 지독하게 잘못 걸린 것 같다. 그건 완전하다는 것이다. 잘 모르겠다. 네가 내게 남긴 것이 얼마나, 그 얼마나 대단했기에 장면 장면마다 머무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여야 하는 건지에 대한 고민의 늪에 나는 오늘도 빠지고 말았다. 겹치는 장면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정말 하나도 없는데. 모든 장면이 또 너다. 완결이 난 이야기에 미련을 가지고 억지로 이어 쓰려는 것 같은 지루한 이야기라니. 그 지루한 이야기에 또 살을 붙이고 있다니. 나 자신이 안쓰럽다. 참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네가 내게 남기고 간 시간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다 지나쳐왔다고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라고 말하는 이성에게 아직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 살점을 붙여서 꼭 그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을 거라는 희망을 강제하는 것일까. 없는 희망을 어디서 끌어온다는 것일까. 대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토록이나 과거에 연연하는 것일까. 한심하다고 이야기했다. 너는 흘러갔고, 내게 남은 사람들에게 나는 흘러간 너를 다시 끌어다 놓고 싶다고 했다. 그럴 수도, 그럴 일도 없을 거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끝난 이야기에 다음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인 것 나도 너무 잘 안다.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만 한다는 것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안쓰럽기만 한가보다. 다른 이야기를 꿈꾸지 않는다. 다른 이야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숨이 붙어있는 동안 내내 바라던 것은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질 다음 이야기. 또 다른 우연으로 살이 붙을 지난 이야기. 다 지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던 이야기가 사실은 다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 시리즈물이었고 다시 내용이 이어질 거라고. 시점이 달라지고, 주위에 다른 일들이 생기고 많이 바뀌더라도 우리 두 사람, 그 시간 그대로 다시 이야기가 이어질 거라고.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하다 조연의 이야기로 잠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 두 사람 그렇게 다시 이야기가 이어질 거라고.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라고. 어리석지만 간절한 그 이야기를 꿈꾸나 보다 나는 여전히.


청춘 로맨스를 꿈꾸던 20대의 나는 아직도 멍청하게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실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해서 나는 여전히 스물여덟 그때에 산다고.


참 매번 생각하면서도 이상한 건, 내가 스쳐온 그 많은 사람들 중 왜 너여야 했는지, 왜 아직도 난 너인 건지에 대해 묻고 싶다. 누군가 알고 있다면 내게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 왜 꼭 너여야 하는지. 너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내게 만들어 준 시간과, 그 이야기도 분명 있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흘렀다. 결말이 다 쓰였고, 마침표도 찍었다.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아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마침표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너와의 이야기 끝에 찍힌 마침표에 꼬리가 붙을 것만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잘 안다. 절대 이뤄지지 않을 꿈같은 이야기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쓸쓸한 얼굴로 혼자 쪼그리고 앉아 외로이 그 마침표 곁을 아무리 맴돌아도 꼬리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져 가는 그 이야기에 머물던 네가 보고 싶다.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게 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눈앞에 사라져 가는 너를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것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을 보니 그저 짰다.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짜게 느껴졌다. 이런 내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내게 한심하다 할지 모르겠다. 많이 아팠고, 잊기 위해 많이 애썼다. 네가 만들어준 한 장 한 장의 추억들이 쓰인 페이지들이 아까워서 그렇게 울어대도, 지우려고 애 정말 많이 썼다. 하지만 아무리 울어도 넘겨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머무는 페이지엔 그래도 네가 숨 쉰다. 아직 그곳엔 네가 있다. 다음장을 넘기지 않으면 너는 그곳에 있다. 그저 그 이유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아쉬운 마음에 흐려지는 너를 붙들고 차마 놓지 못하고.


여전히 내게 너는 있다. 돌아선 뒷모습이던, 아니던 그것은 상관없다. 네가 만들어주었던 너로 쓰였던 그 시간들과 그 페이지를 조금 더 오래 두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저 흐려지는 것들의 속도가 조금 더디길 바란다. 내가 붙잡고 있는다 한들 너의 시간에는 이미 내가 다 지워지고 없겠지만. 너의 그 수많은 페이지들엔 어떤 이야기가 쓰여있을까. 혹시 너도 같은 페이지에 멈춰 흐려지는 이야기들을 붙잡고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이길 그렇게 이야기의 반전이 있길 바라는 것은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그저 그것만으로 잠깐의 위로가 되니까.


참 미웠다. 너라는 사람과 쓴 문장의 결말도, 결국 찍어야만 했던 그 마침표도. 흐려지는 우리의 시간들도. 참 미웠다. 내가 했던 잘못들만 생각이 났다. 그래서 너무 미안했다. 어차피 같은 결말이었다면 조금 더 사랑할 것을. 그것을 못해 슬픈 결말이 되었다. 이야기의 마침표가 엉뚱한 곳에 찍히고 말았다. 시간에 태엽이 달려 다시 감아 되돌릴 수 있다면, 우리의 이야기의 끝을 바꾸고 싶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지만, 어차피 우리의 페이지가 그곳에서 끝이 나야만 한다면 조금 더 후회 없게 사랑하고 싶다. 마침표를 찍기 전에 정말 후회가 남지 않게 사랑한다고 하고 싶다. 그저 그게 다라고 이야기하기엔 이렇게 많은 미련에 붙들려 겨우 숨 쉬고 있지만, 정말 그게 다였다. 남은 후회가 아프다. 조금 더 사랑할걸. 남은 마음이 얼마나 크기에 나는 여전히 그 무게에 짓눌려 오도 가도 못하는 걸까. 우연히라도 널 닮은 사람을 만나길 고대했다. 물론, 지금도 다를 바 없다. 내게 웃어주던 그 얼굴이 이제 다 흐려졌다 생각하면 끝에 네가 또 웃는다. 흐려지던 네가 거짓말처럼 다시 선명해진다. 잔뜩 비웃는 것 같다. 너를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너는 어떨까. 너에게는 내가 이미 흐려지고, 우리의 이야기가 이미 낡아져 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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