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것은 그저 이는 허무
무엇이든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다. 예쁜 딸, 귀여운 손주, 하나뿐인 누나. 그런 것들을 벗어나 빵을 만드는 사람, 커피 향이 나는 사람. 좋은 친구, 좋은 선임, 잘 따라오는 후임. 때때로 내 이름은 딸이었다가, 누나였다가, 언니였다가, 동생이었다가. 그러다 후임이었다가 선임이기도 하고, 매니저였다가, 팀장이기도, 점장이기도 하고. 부르는 사람에 따라 내가 서있는 공간에 따라 위치에 따라 이름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 나름대로 불리는 것마다 저마다의 매력이 있고, 좋았다. 내 이름이 이렇게 많아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나는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위해 정말 애를 썼다는 거겠지. 그만큼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남아 손에 쥐는 것이 없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았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위해. 그리고 무엇이라도 되고 싶었다. 잊히기보다는 불리고 싶었으니까.
지금의 나는 그 먼 길을 달리다 나름대로의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 나는 불리기보다 잊히고 싶어 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기까지의 시간과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잊히는 것은 순식간인 듯하다. 그렇게 열심히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 불리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는데 그 시간이 내 나이만큼이나 걸렸는데, 잊히는 데에는 정말 한순간이구나.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정말 먼지 같았구나 하는 허무가 인다. 참 어렵다. 그토록 애써서 쌓아온 시간들이 이렇게 가벼운 거였다니.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이제는. 나는 그저 나로 살고 싶어 졌다. 도저히 이 허무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것들을 해내고, 그런 것에만 집중하느라 정작 내 진짜 이름은 잊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보다 나는 앞으로 나로서 살기 위해 살아온 만큼의 시간을 소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