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너로 시작된 하루, 너로 끝난 하루를 쓴다. 여전히.
너로 시작된 하루가 그렇게 끝이 났다.
너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 영영 안녕이 아닐 거라고 믿었던 우리의 하루에 너는 그림자만 두고 갔다. 갈 거면 흔적일랑 남겨두고 가지 말지 그랬냐는 원망이 그림자를 덮는다. 그렇게라도 그림자를 숨긴다. 보지 못한다고, 보지 못했다고 나를 속인다. 네가 남기고 간 하루에 네가 남기고 간 그림자. 돌아봐도 너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서도 감지 못하는 두 눈. 자꾸만 너를 쫓는 눈. 그렇게 일기를 쓴다.
내 일기장 가득 너의 이름이 빼곡히 채워진다. 여느 때와 같이 마치 하루를 함께 보낸 듯이. 함께 하지 못한 하루를 가득 채우는 시간만큼은 너와 함께라고 여기고 싶언던 걸까. 일기 가득 쓰이는 문장들이 멈추지 않길 바랐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함께인 것 같았으니까. 여린 마음에 빼곡히 담은 너를 꺼내려다 나는 또 부서진다. 눈물이 새어 나온다. 멈출 줄을 모르고. 그것까지 알려주고 갔다면 나는 미리 알고 피할 수 있었을까.
하늘에서 떨어져 흩어지는 별들에 고개를 들고 간절히 기도한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너를 내 기억에서 거두지 말아 달라고. 사람은 언제나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기억을 희미하게 잊어간다. 어쩌면 붙잡고 살아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 말고는 애써 잊으며 살아간다. 아니 잊으려고 하는 것조차도 노력이라는 것을 한다. 근데 그 노력이라는 것이 참 뜻대로 되지는 않지. 내가 여전히 너의 기억을 붙들고 너를 잊고 싶다는 모순을 이야기하듯이.
나는 모순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아끼나 보다. 어떤 일도 다 모순이라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우연도, 기적도 희망도, 노력도, 생각도.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낸 생각들 속에, 문장들 속에서 다시 번지는 모순일 뿐이다. 그 생각을 가지게 되는 나 역시 모순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너를 잊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희미해져만 가는 너를 선명히 기억하려고 애쓰니까. 한 순간도 잊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 잊었다고 나를 속이고 오늘을 또 살아내니까. 인생에는 붙들고 싶은 기억들이, 간절한 기억들이 있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그것들은 참 신기하리만치 선명해진다. 옅은 기억력의 꼬리를 붙들고, 참 이상하게도 더 짙어진다. 강해진다. 힘이 생긴다. 기억에도 힘이 생긴다는 말이 참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엔 그렇다.
잊히길 바라면서, 더 선명해지길 바라기도 한다. 어쩌면 내 모든 순간이 그래서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기억의 한 조각쯤은 남겨두고, 붙잡고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잊히길 간절히 바란다고 이야기하면서, 아주 간절히 그 끝을 붙들고 늘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그 기억만으로 오늘을 하루 더 살아내기 위해서. 어쩌면 이런 이야기에 당신은 이해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내게 남기고 간 어떤 행복이 나를 이렇게 당신의 기억을 붙들고 살게 했는지. 당신은 알 수 없을 테니까.
원망했다. 참 많이도 원망했다. 당신의 마음도, 당신의 행동도. 당신이 남기고 간 추억이란 이름의 그림자도. 다 원망했다. 당신이 할퀴고 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처만 가득하다고. 근데 새 살이 돋고 나니, 그래서 나는 잘 견디고 살아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이 할퀴고 간 덕분에 나는 또 하루를 성장했다. 그리고 사실 당신이 할퀴고 간 것들보다 당신이 남긴 행복이 내게 더 많고, 더 깊고, 더 컸다는 것을 수십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당신이 들을 수 없는 이 메아리를 혼자 또 떠든다. 당신 덕분에 행복했다고, 그래서 그 기억을 붙들고 오늘을 또 살아낸 거라고. 미움과 원망도 결국은 아쉬움이었더라고.
나를 혼자 두고 떠나는 것이 어려워, 당신이 그림자를 남겨두고 떠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하루는 바뀌었다. 컴컴하고 어두운 긴 터널에서 아늑하고 포근한 기억의 방으로. 행복을 가득 모아둔 그곳 말이다. 터널에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을 뿐인데 세상은 참 아늑하고 포근해졌다. 당신이 남기고 간 그림자를 껴안고 한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미움이 가득 찬 마음에 미움이 가고 감사가 남았다. 여전히 너를 쫓는 눈도, 미움도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사는 내내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시 계절이 바뀌고, 네가 남긴 그림자마저 저 구석으로 사라질 때, 그때가 온다고 해도. 네가 남기고 간 추억이란 이름의 그것들은 형태가 바뀌지 않고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다. 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그것도 기약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그렇게 너로 시작된 하루에 또 너를 남긴다. 새로운 페이지를 써 내려가는 것도 여전히 너로 충분하다. 아직은.
애쓰지 않기로 했다. 흘러가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거라면. 굳이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나간 너를 사랑한다. 그때의 나를 사랑한다. 여전히. 바뀐 것은 없다. 그저 너는 너의 시간을 걸어가고, 나는 나의 시간을 걸어가는 것. 그리고 내 일기장은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에 머물러 있다는 것만 빼고. 하지만, 괜찮다. 어제의 나는 괜찮지 않았겠지만, 오늘의 나는 괜찮다.
기억의 끝을 붙잡고, 늘어져 있어도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거다.
인정하고 나니, 조금은 괜찮아진 것도 같다. 물론, 기분 탓이겠지만. 흘러간 시간을 두고 네가 남긴 그림자에 숨어 조금 더 기억을 붙들고 살아 내다 보면 언젠간 똑바로 서는 날이 오겠지. 그런 날이 오면, 그땐 또 새로운 일기를 쓸 수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그냥 살아보기로 했다. 그러니, 나는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거다. 그러니 마음을 재촉하지 않았으면 한다. 재촉한다고 달라지는 것 없으니.
내가,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
희미해져 가는 너를 겨우 붙들고 산다고.
색을 잃고, 바래져가는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