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영화

상영기가 고장 나 버렸으면 좋겠다, 그거면 좋겠다.

by maudie

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때의 시간을 사랑했습니다. 그때의 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찰나의 순간들을 놓지 못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 사람을 알았고, 그 사람을 만났고, 그리고 그 사람을 잃었던 모든 순간들이 영화가 되어 잊을만하면 머릿속에 상영됩니다. 기술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아무리 상영해도 닳지도 않습니다. 선명함 그대로, 마치 눈앞에 지금 그때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합니다. 영화는 끝이 났는데, 나는 또 되감기를 하나 봅니다. 홀로 외로이 상영관 중앙에 앉아있나 봅니다. 다시 또 꺼내보고 또 꺼내보고. 언제쯤 지칠까요. 언제쯤 질릴까요, 그 영화는. 이제는 질릴 때도 되었는데 말이죠. 선명했던 장면들이 아주 가끔 나이를 먹고 흐려집니다. 때마다 선명하지 않은 기억이 아쉽다 생각할 만큼, 나는 아직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이 영화가 아주 오래전 끝이나, 잊혀버린 어떤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겠죠. 지나간 영화. 그저 그게 다일 겁니다. 반복해서 다시 보는 나와는 다르게요. 영화를 보는 시간을 사랑합니다. 여전히 잊히지 않은 그 영화가 다시 보고 싶습니다. 상영기가 고장이 나버리면, 멈출 수 있을까요. 그럼 그때의 나는 연기처럼 타버려 재만 남겠죠. 아직도 이렇게 선명한 한 편의 영화가 지워져야만 한다는 게 아쉽습니다. 누구에게도 가서 닿지 못할 다 낡아버린 마음임에도, 멈추질 못합니다. 눈을 감으면 영화는 이상하게 더 선명해집니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가도 그 사람 얼굴만큼은 또렷해집니다. 차라리 기억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상영 기도 고장이 나고, 필름도 다 늘어져 이제는 그 얼굴이 또렷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진 이 미련은 오롯이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닌 그때의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지루한 영화 한 편이 끝났습니다. 그저 그렇게만 남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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