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은 소품처럼 놓아두어야지

오래 머문 페이지

by maudie

요 근래 마음을 두드리는 책을 만나지 못했다. 에세이를 주로 읽는다기보단 에세이 말곤 어떤 것도 읽지 않는다고 더 어울리는 나는 에세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화려한 말빨로 아니 글빨로 적힌 그런 완벽한 이야기보다는 '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아,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쉽게 경험할 수 없지만, 결국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 결국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공감이 되지 않아 덮을까 싶으면 정말 공감돼서 오열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 소소한 산책을 하는 듯했더니 나를 들여다본 것만 같은 그런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좋아한다. 완벽하게 짜인 것들 보다, 생각의 흐름대로 투박하게 써 놓은 글을 좋아한다. 조금 어렵더라도 결국 마음을 툭 치고 가는 그런 이야기. 그래서 에세이를 읽는다. 하지만 그런 책들을 찾아 헤맨 지 시간이 꽤 많이 흘러서인지. 새로운 울림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비 오는 거리를 양껏 비 맞으며 뛰어가던 날도, 뜨거운 햇살에 치이고 나른한 그 더운 날도. 오랜만에 발길을 한 그날도. 수 번을 아니 수 십 번을 놓쳤다. 이야기를 놓쳤다. 마음을 놓쳤다. 나를 들여다볼 거울을 놓쳤다. 만나지 못했다. 비껴갔다. 인연이 되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외출을 하는 날이면 꼭 서점을 들르곤 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빈손이었다. 늘 아쉬움이 가득했다. 시국의 탓을 하며 누구도 만나지 않고 방구석에서 지내던 나는 나가는 일이 생기면 꼭 한 가지 이야기라도 데려오겠다는 마음으로 집 밖을 나서지만 결국 빈손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히 흘렀나 보다.


새로운 이야기가 고팠다 이제는 궁금하지 않아 질 정도로 무뎌진 어느 날 만난 책 두권. 그 두 권의 책이 들어왔다. 표지부터 문장까지 마음에 들었다. 내용은 기대와 다를까 싶어 여느 때와 같이 인스타그램에 작가님의 계정을 검색했다. 그렇게 책들을 유심히 들여다봤고, 두 권의 책을 읽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나는 곧장 두권 중에 한 권을 구매했다.


[ 내 사랑은 소품처럼 놓아두어야지]


표지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책의 제목도. 나는 책을 고를 때 우선 표지를 먼저 본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 표지에서 완전하진 않지만 그 책을 쓴 사람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그리고 제목이다. 제목에선 그 책의 가장 중점이 되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책의 내용은 잘 보는 편이 아니다. 책을 직접 보고 고르게 될 때에는 딱 한 페이지를 펼쳐서 문장의 결을 본다. 이 사람의 말투 같은. 그 문장의 결이 나와 맞으면 그중에 나를 유혹하는 문장을 찾는다. 그게 있으면 더 이상 고민 없이 데리고 오곤 한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까다롭다고 할 수 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쳤는데, 문장이 나와 결이 맞지 않으면 고민 없이 내려놓고 다시 보지 않는 편이다. 그게 유명한 작가고 아무리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궁금하지 않은 편이다. 마음을 긁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만으로 나를 툭 건드렸다. 사실, 표지를 보기 전에 제목을 먼저 알았다. 제목만으로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한참의 고민을 했던 부분이 있다.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부분이다. 생각이나 문장의 흐름이 시시각각 변화할 부분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했던 것 같다. 같은 페이지에서.


책은 새벽에 주문했는데 그날 오전에 바로 도착했다. 이런 경우는 거의 드문 일이라 조금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반가움이 더 컸다. 책을 만나 한동안은 책상 위에 그대로 두었던 것 같다. 흐름이 끊기는 것이 싫었다. 왠지 이 책을 읽으면 한 번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 책의 문장은 생각보다 무게감이 있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생각에 생각을 부르는 문장에 감탄을 했다.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느낌의 문장들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읽고 다시 읽었다. 이해가 돼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만큼의 매력이 넘쳤다. 누군가가 극찬한 책에 매력을 딱히 느끼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책을 쓴 두 작가의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조금 부드럽고 다정한 느낌의 과하지 않은 꽃향기가 날 법한 문장이 있는 반면, 무거운 우드 향이 날 것만 같은 문장이 있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적이었다. 이래서 내가 한 번에 이 책을 읽고 싶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책은 한 번에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책을 펼쳐 들어도 금세 빠져들었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지만,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읽은 느낌이었다. 마음을 채웠다. 허전했던 무언가가 채워졌다.


햇살이 부서지는 뜨거운 여름이지만, 습하지 않아 그늘에 앉아 살랑바람을 맞고 있으니 괜히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산책을 하다가 문득 다시 책이 떠올랐다. 이렇게 기분 좋은 여름날, 지나칠 수 없는 분위기에 바깥에 앉아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에어컨이 틀어진 집에 들어오자마자 생각이 바뀌어 책상에 앉아 버렸지만. 그런 분위기에 바람을 음악 삼아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 어두운 조명 아래 향초 하나 켜 두고 침대 위에 앉아 읽어도 좋을 것 같은 분위기의 책이다.


여러 가지 잡생각을 가득 채운 페이지를 넘겨, 다시 책으로 들어간다. 오늘 펼쳐 든 페이지에 나는 다시 책을 덮고 말았다. 괜히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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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헤매던 안개 숲을 빠져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애타게 찾던 퍼즐 한 조각을 드디어 찾은 것 같아요. 또렷이 보고 싶어서, 명확하게 듣고 싶어서, 완전하게 이해하고 싶어서 안간힘을 써도 소용없던 날들의 마지막을 지금 통과하고 있습니다. 갸우뚱했던 결말에 내가 놓친 장면이 분명 있을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다시 돌려봤던 그 영화가 그랬듯이 역시 놓친 장면은 없었고 같은 장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나의 경험 부족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내 물음표로 남았던 그날의 장면이 느낌표로 바뀌는 이 순간이 조금은 슬퍼요. 어쩌면 나는 막막한 안개 숲에 더 머물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마지막 퍼즐은 영영 찾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왜 이 페이지에 오래 머물렀는지 사실 모르겠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그냥 읽으면 쉽게 읽혀 지나갔을 이 문장을 붙들고 한참을 머물렀다. 무슨 마음이었을까에 대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문장들이 나를 건드린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한참을 머물렀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페이지를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한참을 다시 읽고 다시 읽은 후에 나는 다음 페이지로 가지 못하고 책을 엎었다. 그리곤 이렇게 수다스러움으로 반가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이게 왜 마음을 울렸을까, 왜 이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는 걸까. 하는 어쩌면 이해하지 못할 부분에서 나는 머물렀다. 신이 났다. 괜히 나를 아는 것 같았다. 이 수다스러운 마음을 진정하고, 나는 다시 책을 펼쳐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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