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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die Jul 17. 2021

바람이 불고, 무지개가 떴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쓰고, 드라마가 됐다.

마음에 살랑바람이 불었다. 네가 내게 스치듯 들어왔다.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너는 그렇게 바람처럼 내게 불어와 내게 머물렀다. 뜨거운 여름 온몸에 맺힌 열기를 식히듯 그렇게. 


사람인가 귀신인가 싶을 정도로 흐릿하게 보였다. 안경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나는 너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장면을 후광이 비치는 무엇으로 표현하겠지만, 그저 나에게는 인상 찌푸리게 하는 햇살, 그것 사이로 보이는 흐릿한 생명체였다. 부는 바람에 머리가 살랑, 묶었던 머리끈이 풀어지고 그것을 줍느라 숙였다 고갤 들어 흐트러진 안경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서야 네가 보였다.


"앗!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가 우리에게 다시 바람을 일으켰다. 떨어진 머리끈을 줍다가 어쭙잖은 시력으로 끼고 있던 안경에 갑자기 어지러워 흐린 너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머리끈을 줍고 추켜올린 안경 사이로 본 너는 반짝이는 게 꼭 저 눈부신 햇살 같았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죄송하다고 인사를 건네고 다시 본 너는 무지개 같았다. 햇살에 부서지는 반짝이는 어떤 것. 습한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보송보송해졌다.


"괜찮아요? 제가 죄송하죠. 앞을 봤어야 했는데."


나의 죄송하다는 사과에 너는 네가 더 죄송하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게 됐다. 평소 같았으면 '에에-' 하고 당장에 스쳐 지났을 텐데, 그러기에 넌 너무 예뻤다.

'무슨 놈이 저렇게 예뻐?'

마음 한가운데 문장이 쓰였다. 무슨 놈이 저렇게 예쁘냐는 질문. 그 문장이 타 다다닥. 쓰이고 말았다. 그렇게 바람은 지나갔고,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었다. 하찮은 인사를 건네고 흩어진 바람이 아쉬워 어쩔 줄 모르는 채로, 그렇게 1년의 시간이 지났다.


"신인 작가 영원, 등단을 축하합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망상을 접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와의 일을 상상하며 쓴 로맨스 소설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나는 진짜로 작가가 되었다. 내 이야기가 드라마로 쓰인다는 얘기가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렇게 나는 너의 이야기로 잔뜩 도배된 세상에 살았다. 잠깐의 바람처럼 그저 스친 너였는데, 나는 얼마나 네가 선명했기에 너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걸까. 너와의 시간을 쓸 수 있었던 걸까. 온갖 상상에 상상을 더해 나는 문장을 그려나갔고, 그것들은 결국 너를 만난 그날 너의 모습처럼 반짝였다. 


"야, 이 미친년아. 너는 무슨 한번 본 사람으로 글 써서 작가가 되냐. 니도 참 대단하다. 너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궁금해."

"그래, 엔간히 이야기하고 대일 때부터 알아봤는데, 참 어지간하다 니도. 그래서 그 사람은 그 이후로 만나본 적 없고? 그냥 진짜 니 소설에만 존재하는 사람인 거 아니가. 실존인물이긴 하나? 이건 뭐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 고마 못 믿으면 때려치라! 마, 그냥 소설 속의 인물인양 생각 하모 대지 뭘 그래 캐쌓노. 아가리 해라."

"야, 안 믿겨서 그런 거지, 별 뜻 없다. 알제? 그냥, 신기해서 그렇지. 도대체 얼마나 잘생겼으면, 그 사람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네가 쓰고 앉았나 싶은 거지. 남자엔 관심도 없던 년이."


친구들도, 가족들도. 모두가 믿지 않았다. 내가 본 그 눈부신 날의 무지개 같던 사람.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쓴 글로 드라마를 만들다니. 사람들 모두가 경악할 일이긴 했다. 그간의 문장들은 어둡고 어두워서 에세이를 쓴답시고 아무리 써댔어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너무 무겁다나 뭐라나. 뭐, 아주 없던 건 아니지만, 긍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환영받진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대부분 어두운 이야기를 썼었는데, 그 사람을 만난 뒤로, 처음으로 일랑일랑 한 분위기의 문장들을 끄적이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 이야기로 드라마까지 만들게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차긴 하다. 그렇게 축하를 받고 날아가는 기분이 구름을 타고 있는 동안, 눈앞에 정말로 거짓말처럼 네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영원... 작가님?"

"? 에에? 저를 알아요?"

"글 잘 읽었어요. 팬이에요, 작가님! 평소 작가님 글 정말 잘 읽고 있었어요! 어쩌다 보니 제가 그 드라마 주연을 맡게 되었습니다. 진짜 영광이에요, 작가님!"


이기 무신 소리고. 내 문장의 주인공이 내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니. 이게 무슨 미친 전개고.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감독님이 이야기를 한 주연의 배우들 몇 명에 대한 신상을 더듬어봐도 이 사람은 없었다. 없는 존재였다. 어디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거지 싶었다. 머리를 뎅- 하고 치고 갔다.


"작가님? 작가님?"

"아, 네! 어어, 그 - 제가 들은 게 없어가지고요. 주연......... 이라고요?"

"네네, 작가님 드라마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된 안 온이라고 합니다!"

"네? 이름이 뭐라고요?"

"네, 작가님! 안온하다 할 때, 그 안온입니다!"


'옴 맴매-, 내가 하필이면 인사로 제일 많이 사용하던 말이, 제일 좋아하던 말이 왜 또 거기서 나오노. 안온이라니. 거 이름도 예쁘네. 아니 아니 잠깐 이게 아니지.'


"아, 네 - 반가워요. 어어-!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

"네- 작가님, 대본 리딩 때 뵙겠습니다!"

"네네! 어어 잘.. 잘 가요! 조심히 가요!"


아니 이게 지금 내가 꿈꾸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내가 만든 이야기의, 내 상상 속의 인물이 실제 인물이 된다는 거잖아. 무슨 이런 기도 안찰 이야기가 있노. 당장에 감독님께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집으로 가 헝클어진 생각들을 다시 정리해 보기로 했다. 이 상태로 감독님께 전화를 했다간 잔뜩 헛소리만 늘어놓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왠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자 -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어 - 왜."

"뭐, 니는 전화를 그따우로 받노"

"아, 뭐. 왜. 왜 전화했는데. 나 지금 로운이 나오는 거 봐야 된다고."

"아니, 야 내 지금 뭔 일 생깄는지 아나."

"뭐가. 왜왜. 니 또 뭔데! 빨리 말해라! 뭐뭐!"

"아니, 있다 아이가. 아이다. 내 나중에, 나중에 확정 난 거 보면 얘기해주께."

"아, 뭔데 빨리 말해라. 궁금하게 하고, 이랄끼가."

"아니, 뭐 나면은 있잖아. 그때 그 무지개."

"무지개? 뭐, 니 소설 속에 글마 그거? 무지개 같았다던 글마? 니 뭐 아직도 소설 쓰나. 완결 안 났나. 드라마 쓴다카더니 다시 소설 속에 드가뿐나?!"

"아니, 그게 아니라. 글마가, 글마다."

"뭐라쿠노, 말을 똑디 해라. 뭐가, 뭐라고?"

"아니, 글마가, 글마라고!"

"말을, 고 따위로 할래? 뭐가 글마가 글마라고! 알아듣게 말을 해라. 가시나야!"

"내 그 드라마 주연 그 사람들 명단에 분명히 없었그든, 근데 글마가 갑자기...!"


"저, 작가님! 아직 안 가셨네요?"


"야!!!!!!! 야!!!!!! 뭔데, 야!"

-통화 종료.


"아, 아아. 아아아아.. 어. 네. 그....ㄱ.... 그 그... 아, 어 안녕히 가세요!!!!!!!"


'에이씨-. 왜 일로와 왜왜! 도대체 왜! 아니 왜! 통화하는 거 들은 거 아니가. 아니 나, 미치겠네. 절대 들키면 안 된다고. 정신 채리자. 집에를 먼저 드가자. 드가서 생각이라는 걸 다시 해보자. 절대 못 들었을 거야. 그렇지?'


"저!!!!! 작가님!!! 작가님!!!!!!"


'후. 어디까지 따라올라고, 저 지랄이고. 저 지랄이. 으으으으으...!!!!!!!! 으 쪽팔려. 들키면 머신 쪽이고 이게. 아, 미쳤다 미쳤어. 나는 왜 거서 전화를 해가지고. 아유 미친년. 그래 내가 미친년이다. 일단 못 들은 척하고 집에를 가자.'


-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어, 어왜."

"야이, 미친! 야, 왜 말하다가 끊냐, 마! 빨리 말을 해라."

"뭐를."

"아니, 네가 글마가 글 마래 매!!!!!!!!!!!!!!!!!!!!!!!!!!!!!!"

"내가 지금 닌테 갈게. 기댕기"

"빨리온나, 인마! 니 별거 아이면 디진다 진짜."

"오께- 니 인자 기절한다. 기대리라. 내 지금 여서 말 몬한다."

"아라따. 맥주?"

"콜."

- 통화 종료.


- 빈이네 집 앞 편의점.

"아니, 미친년이 그냥 전화로 말을 하면 되는 거를, 뭐가 무스브가 저카노. 어허. 맥주는 ~ 뭘로하까나~ 아, 뭐묵지."
"저기, 죄송한데. 저 이거 먼저 꺼내도 될까요?"

'옴마야.... 이기 사람이가........... 이기 뭐고.'

"저기, 저기요?"

'와, 무지개..... 무지개 같다. 아, 원이 저년이 사람보고 무지개 같다쿠드만, 딱 그 짝이네. 와.....'

"저, 죄송한데요. 이거.. 이것 좀!"

"아! 아, 네네네네네네네! 먼저 꺼내세요, 네네 먼저 꺼내세요! 호호"

"아, 감사합니다!"

"아, 웃는 거 보소, 와, 이기 사람이가. 진짜.. 하.... 연예인 이노 연예인."

"네?"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 네. 감사합니다! 저, 그럼."

"네네, 살펴 가세요 오 -"

"와, 아니 이게 머고, 이게 머선 일이고. 와, 연예인보다도 연예인 같네. 와 씨. 깜짝 놀랐네."


- 빈이 자취방


띠띠띠띠.

"마, 왜캐 늦게오노, 인마!"

"머, 니는 뭐 느그집처럼 드가 있노."

"뭐를. 새삼스럽게 떠드노. 느그집이 내 집이지 뭐."

"아, 됐고. 내 방금 신기한 거 봤다이!!!"

"뭔데. 뭐 신상 과자라도 봤나."

"아니이! 아니, 인마! 머 내는 뭐 과자에 환장한 년이가?!"

"네가 뭐, 언제나 그렇듯. 과자에 환장한 년이지 뭐긴 뭐야. 신상에 환장했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아니, 뭐 맞긴 맞는데. 그게 아니고!!!!! 마! 내 최애보다 잘생긴 놈 봤음!"

"뭔 소리고, 니 최애?"

"그래, 내 최애보다 잘생긴 놈 봤디~ 네가 사람보고 무지개 같다고 한 게 뭔지 알겠음. 나 인제 알 거 같음~ 진짜로!"

"무지개? 무지개????? 설마, 니 설마. 에이 설마. 여기까지 따라왔겠니."

"뭐, 누가 따라와? 니를?"

"아니, 그게 있잖아. 내가 쓴 그 소설 있제."

"어, 그래! 니! 드라마 작가 됐다매! 축하한디!!!!!!!!!!!! 꺅!!!!! 네가 드라마 작가라니 미칬다, 미칬서!!!!!!!!!!!"

"아니, 아! 아! 아프다!!! 미친년아, 고마 때리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뭐를. 이기 중요한 게 아니면 뭔데!"

"아니! 글마가, 글마라니까?"

"아니, 그러니까 글마가, 글마라는 게 뭐냐니까?? 뭐, 말을 똑바로 해라. 인마, 내가 뭐 네가 그래 말하면 다 알아 들어야 되나. 이게 미쳐가지고. 똑바로 말을 해라!"

"아, 씨 왜 말귀를 못 알아듣노. 내 그 무지개가. 진짜 그 무지개라고."

"아니, 그니까 무지개가. 뭐??????!!!!!!!!! 홀뤼! 미친!!!!!!!!!!!"

"아, 좆됐음."

"뭐를!!!!!!!! 야!! 인마, 좆된 게 아니라, 경사 났지. 말은 똑띠 해라. 미친. 이 새끼 출세했네. 그래서 누군데. 니 무지개가 연예인이었나. 와, 씨 - 이 새끼. 그러면서 누군지 말도 안 해줬나. 아 진짜 개 빡치네! 치사하게!"

"연예인........ 인가?"

"건 또, 무슨 소리고."

"아니지, 인제 연예인이지."

"뭔데, 설마 신인이가."

"아까, 내인 테 인사하던데."

"누가, 무지개가? 무지개가 니인 테 인사 하더나."

"어, 미친. 처음에 또라인 줄. 미친놈이 따라오는 줄."

"아니, 니 똑바로 말을 해봐라."


나는 등짝을 수십대를 맞은 후에야, 이야기를 꺼냈다. 도저히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야기를 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한참을 망설였다. 어쩌면,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거라, 드라마에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 조심스러웠지만, 이걸 어떻게 말을 안 하노. 그래서 절대 어디 가서 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등짝이 벌게진 후에야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나 소설을 쓰게 된 것부터 오늘 낮에 있었던 일까지 여태 말하지 않았던 모든 이야기를 쏟아냈다. 글을 쓰면서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소설을 쓰는 것이라 부끄러운 마음에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다 쓰고 나서야 소설을 보여줬고, 소설은 어차피 진짜 상상의 나래를 펼친 만들어낸 이야기였기 때문에 다 쓰고 난 이후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소설이 뜨고, 드라마로 확정 나면서 내 이야기를 읽지 않았던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읽었고, 아무도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재밌었다, 딱 그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모두 쏟아낸 다음 친구의 얼굴을 보았는데, 상당히 반짝 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미친아, 니 출세했네! 니 소설이 드라마로 나온다는 것도 놀랬는디. 와 씨. 이러다가 진짜 소설처럼 되는 거 아니가. 존나 부럽네~아이고~ 배야!"

"야, 나는 지금 심각하다고. 니 어디 가서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알제. 떠들면 안 됨. 스포 하면 안 됨."

"야, 내가 눈지 알고 떠드노."

"암튼, 그 무지개가, 진짜 무지개가 됐다는 게 진짜 소름 끼침. 감독님이 그걸 알리도 없고, 지도 모르는 거 같던데. 어쩌다가 그냥, 감독 눈에 들어서 들어온 것 같든데. 하, 진짜 이거 괜찮겠제?"

"아니, 뭐 안 괜찮은 건 또 뭐고. 야, 근데 니 팬이라고 말했대매! 니는 그 사람 이름도 몰랐디가."

"어, 내 여 오면서 봤는데, 뭔가 이름이 익숙하길래 내가 다시 봤지. 그 글 쓰던 어플 켜가지고. 근데 거기 떡하니 그 이름으로 내 글 전부 다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던 거. 와, 내 진짜 너무 놀래서 자빠질 뻔."

"와- 씨, 폈네, 폈어. 인제 그 드라마가 실제만 되면 좋겠다."

"야, 그라면 뭐하는데. 그 사람은 여주인공이랑 정말 소설 속 등장인물 밖에 더 되나. 마, 별거 없다."

"야, 그래도 촬영장에서 맨날 보는 거 아님?"

"나는 뭐, 글만 수정해서 내보내는 거지, 뭘 내가 맨날 거 가겠니."

"아, 맞나. 아 ~까비."


나는 글을 쓴 사람이고, 내 소설을 대본으로 바꾸는 것만 도움을 줄 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분명, 그를 더 이상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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