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udie Jul 17. 2021

무지개는 시도 때도 없이 뜬다

잠깐 뜨고 지는 건 줄 알았더니, 숨어 있었다.

밤새도록, 미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등이 시뻘겋게 물들고, 미친 듯이 부러워하는 친구와 맥주를 마셨다. 원체 술을 마시지 못하는 우리였지만, 이상하게 어제는 밤새도록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아침해가 어스름하게 올라올 쯤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ㅇ.... 여부.......ㅅ...."

"아! 작가님? 작가님? 나예요, 이 감독."

"ㅇ.... 에...? 누.....ㄴ...ㄱ..... 누구여?"

"나요, 나. 이정연."

"아... 아! 네! 감독님!"

"왜 안 오세요! 작가님! 시간 다됐는데!"

"예..? 어딜, 어디를요?"

"리딩 날짜 바뀌었는데, 연락 못 받으셨어요?"

"오늘요? 지금요? 저 못 받았는데?"

"아니, 어제 그 안온 씨가 작가님 봤다고, 시간 자기가 알려주겠다고 뛰어갔는데, 분명? 잠깐만요, '저기! 안온 씨! 작가님께, 전달한 거 맞아요?', '아, 죄송해요! 어제 작가님이 갑자기 급하게 가셔 가지고..!', '아니, 그러면 나한테 말을 해줬어야지!', '죄송합니다.' 아, 저 작가님! 어제 바쁜 일 있으셨어요? 전달하려고 했는데, 작가님이 바빠서 가셨다고 하네요. 아유, 제가 전달받았으면, 문자라도 남기는 건데 죄송해요. 끝나기 전엔 오실 수 있죠?"

"아, 감독님! 아, 저 근데.. 제가 꼭 리딩 가야 하나요?"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오셔야죠. 배우들 정해졌고, 인사도 나누고. 작가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리딩 하는지 보셔야죠, 당연히. 제가 감독이긴 하지만, 작가님의 글이잖아요. 꼭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감독들이랑 다르게, 작가님이 모든 촬영을 같이 하셨음, 해요!"

"아, 아, 모든.. 아......"

"처음이라, 불편하고, 어려우신 거 알지만, 저는 그래요. 작가님이 쓴 글이니, 작가님의 방향을 따라가는 게 제일 잘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얼른 준비하시고, 오세요! 한 시간이에요! 한 시간 안에 오셔야 합니다!"

"아, 네네! 지금 얼른 갈게요!"


나는 부스스한 꼴로 전화를 받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잠시 정신을 놨다가, 시계를 보고 마음이 급해져 얼른 샤워를 하고 준비를 끝냈다. 아이돌 빠였던 친구의 자취방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방송국 바로 앞이어서, 가는 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ㅇ... 야... 니 뭔데, 어디 가는데."

"어, 나 리딩! 나 방송국!!!!!"

"야, 야!!!!!!!!!!!!!!!! 나도 데려가!!!!!!!!! 야!!!!!!!!!"


방송국에, 연예인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그녀의 비명을 뒤로한 채, 나는 방송국을 향해 달렸다. 방송국 로비까지 3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마음이 급했다. 방송국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려 화장실로 가 매무새를 다시 정리하고, 심호흡을 했다.


'쓰읍 - 후. 정신 차려. 나대지 마.'


급하게 오느라 화장도 못하고 립스틱만 겨우 바르고 왔더니, 몰골이 엉망이었다. 대충 정리를 하고, 눈썹을 그렸다. 워낙에 눈썹이 없어서 그리지 않으면, 모나리자 저리 가라였기 때문에, 그것만은 놓칠 수 없었다. 눈썹을 그리고 나니 좀 사람 같아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로비로 향했다.


"어! 작가님! 여기에요! 안녕하세요, 작가님!"


'아... 왜 하필 무지개야. 왜 무지개냐고. 왜. 왜.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와.... 씨.'


"네, 네!"

"작가님, 어젠 죄송했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아, 연락처라도 알았으면 문자라도 드렸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ㄱ... 괜찮아요."

"작가님, 이쪽이에요"

"네, 아! 네네."


소설이 드라마로 선택되고부터 미팅 때문에, 그렇게 많이 왔던 곳인데 길을 못 찾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내 눈앞에 무지개가 있다. 오로지 그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정신을 쏙 빼갔다. 어떻게 이 사람이 여기 있을까. 아직도 그게 의문이 가득했다. 그 사람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 리딩장으로 들어섰다.


"아유~ 작가님! 일찍 오셨네요! 가까이 사신다더니, 다행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감독님! 어유, 죄송해요! 제가 어제 일이 있어서.."

"아녜요, 이렇게 늦지 않게 와주셨잖아요. 저희도 인사만 나누고 있었어요. 급하게 스케줄을 바꾸게 된 거라 다 모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려서. 이쪽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 네네. 감사합니다."

"자, 이쪽은 영원 작가님이십니다. 우리는 인사 아까 다했어요, 인사 나눠요, 작가님!"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감독님의 소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앉은 배우들이 나를 따라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진짜, 오래 살고 볼일이다 싶었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나를 보고 인사를 하다니. '하, 영! 원! 너 정말! 잘했다, 잘했어. 장하다.'


"작가님, 영광입니다. 주연을 맡은 정소연입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주연을 맡게 된 신인, 안 온입니다!"

"안녕하세요, 조연 김강태입니다. 작가님, 영광이에요! 저 작가님 글, 진짜 좋아했어요! 정말 팬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저는 신유연입니다. 조연을 맡게 됐어요!"

"..."

"아, 저! 다들 반갑게 인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드라마를 쓴, 작가 영. 원.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짧은 인사를 나누고, 바로 리딩에 들어갔다. 몇몇은 신인이라 리딩의 진행이 더딜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도 리딩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리딩이 진행되는 동안, 감독님은 중간중간 내게 분위기에 대해 물어보셨고, 거기에 맞춰 주연들의 톤이나 표정이 수정되었다. 그렇게 첫 화 리딩이 끝났다. 리딩을 하는 것을 처음 봐서 그랬는지, 연예인이 신기했던 건지. 배우들보다 오히려 내가 더 집중을 못했던 것 같다.


"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작가님, 감독님!"

"고생하셨어요!"

"고생 많으셨어요!, 촬영 때 뵐게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본 촬영 때 봬요, 작가님!"

"자자, 다들 조심히 들어가시고, 작가님 저 좀 잠깐 봬요."

"아, 네네."


감독님은, 배우들과 인사가 끝나자마자 나를 불렀다. 촬영분에 대해 상의할 것들이 있다고 해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긴 곳은 앞으로 촬영팀이 사용할 사무실이라고 했다. 생전 올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에, 내가 서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얗게 바뀌었다. 왠지 모를 어색함이 뼈를 시리게 했다. 순간적으로 추웠다. 처음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났다. 잠시 멍 때리는 동안, 감독님의 말을 듣지 못했고, 감독님은 너무 긴장하지 말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감독님은 몇 안 되는 여성 감독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감독의 자리에 올라 인정받기까지 어려운 시대에 감독이 된, 흔치 않은 케이스 중 한 사람이었다. 편견을 바로 잡고, 찍는 작품마다 대박을 친, 그야말로 황금손을 가진 감독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 감독님은 신인 작가들의 이야기를 선호하는 편이었고, 덕분에 내 이야기가 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 소소한 이야기로 진짜 현실적인 작품을 만드는 게 모토인 사람인 덕분이었다. 정말, 덕분이었다. 아마, 감독님이 아니었으면 내 이야기가 이렇게 드라마가 될 리 없었을 테니까.


"작가님? 작가님? 듣고 계세요?"

"아, 네? 아, 네네."

"그래서, 이 장면에서 분위기를 이렇게 잡아볼까 하는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아, 네! 좋아요!"

"아니, 무조건 적으로 좋다고 하지 말고, 작가님이 생각한 이 장면은 어떤 분위기예요?"

"아, 저는..."


감독님은 아주 섬세하게, 내 글에서 나오는 이미지들을 그대로 연출하길 바라셨고, 나는 감독님의 생각에 살을 붙여줬다. 몇 가지의 장면에 대해 한참을 토론하고 나서야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감독님은 현실적인 분위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었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하는 바였지만, 중간중간 꼭 필요한 요소들이 있었다. 내가 그 무지개를 봤을 때의 그 느낌은 정말 비현실 적이었으니까. 감독님과 미팅이 끝나고, 전날 먹은 술로 쓰린 속을 붙잡고 해장국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 바깥공기를 쐬자마자, 누군가 나를 불렀다.


"작가님!!!!!!! 작가님!!!!!!!!!!!!!!"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고, 나는 놀라 그대로 넘어졌다.


"아! 아야!"

"아! 작가님! 아아!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 네네. 아아. 감.. 감사합니다!"

"아뇨, 제가 죄송하죠. 놀라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작가님, 괜찮으세요?"

"아, 네네."


'아니, 안 괜찮아. 아야야. 꼬리뼈 나가는 줄. 하필, 거기 점자블록이 있을게 뭐람. 아오. 쪽팔려 아오!'


방송국에서 나오자마자 누군가 나를 불렀고, 고개를 돌리고 보니 무지개였다. 놀래서 넘어졌고, 하필이면 점자 블록이었다. 꼬리뼈가 나가는 줄 알았다. 쪽팔림과 아픔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필이면, 무지개라니. 여태 안 가고 나를 기다렸을 리는 없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무지개가 나를 들어 올렸다. 세상 쪽팔려서 눈물이 찔끔 났다. 무지개의 얼굴을 못 쳐다보겠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무지개는 큰일 난 줄 알았나 보다.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 저기... 저기!!! 저기 내려놔요. 내려줘요!"

"아, 작가님 안돼요. 작가님 많이 다치신 거 아니에요? 병원 가요, 병원."

"아, 나 괜찮아요. 괜찮다니까?!?!?!? 나 괜찮다고!!!!!! 저기요!!!!"


힘이 어디서 났는지, 보통 여자들보다 훨씬 덩치가 있었던 나를 번쩍 안아 들고,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나를 들어 안은 채로 무지개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병원이 5분 거리에 있긴 했지만, 나를 들고뛰다니. 보통의 힘으로는 나를 안고 뛸 수 없는데. 부끄러움과 경이로움이 한 번에 몰려왔다. 생전 처음 남자에게 들려 가는데, 신기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괜히 나를 들고뛰었다가, 주연배우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려달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듣지 않던 무지개는 응급실에 들어서자 나를 겨우 내려놓았다. 응급실 침대 위로.


"저기, 선생님! 저 그, 놀라서 넘어지셨는데, 그게.. 점자블록 위에 딱 넘어지셔 가지고, 허리를 못 펴시더라고요!"

"아, 그래요? 환자분 어디가 아프세요? 여기? 여기?"

"아! 아아아 아악!!!!!!! 아파요! 윽윽! 아아악!"

"아니, X-ray 찍어봐야 알겠는데요? 얼마나 세게 넘어졌길래..."

"아, 어떡하지.. 정말 죄송해요, 작가님."

"으.. 어.. 괜찮아요... 하하.... 가... 가보세요. 정말 괜찮아요. 으.. 으읏."

"저기, 보호자분? 저쪽에서 안내드릴게요, 그리고 환자분은 X-ray 먼저 찍을게요."


정말 이렇게 쪽팔릴 수가 없었다. 와. 그거 넘어졌다고, 꼬리뼈가 나갔다니. 말이 되냐고. 온갖 쪽팔림이 가득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무지개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아프더니, 어떻게 거짓말처럼 무지개를 보자마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얼굴을 보면,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냐고요. 정말 마취 주사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작가님! 작가님!"

"환자분! 환자분!"


내 앞에 무지개가 서있다. 온통 머릿속은 무지개로 가득했다. 무지개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파노라마처럼 다시 그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아무리 봐도, 이렇게 사람이 반짝이고, 예쁠 수가 없어. 그것도 남자가 말이야.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나를 들춰 업고 뛰다니. 그것도 무지개가. 다시 생각해도 상상조차 민망했다.


"환자분!!! 제 말 안 들리세요?!??!?!?!"

"아! 아네, 죄송해요. 뭐라고요?"

"골절이라고요, 골절. 당분간은 입원하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안돼, 안되는데!"

"뭐가, 안돼요. 돼요. 그래야 돼요. 2주는 꼼짝없이 계셔야 해요. 저기, 보호자분? 그 환자분 -"


뒷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망. 했. 다. 그냥 온통 망.했.다. 그것만 가득 찼다. 아니, 일주일 뒤에 본 촬영 시작인데 2주를 누워있으라니, 작업은 언제 해!!!!!!! 대본 수정도 아직 다 못했는데. 그건, 안될 말이었다. 젠장. 감독님께는 또 뭐라고 말하냐고.. 온통 드라마 촬영 걱정과, 대본 수정 걱정밖에 없었다. 쪽팔림이고 나발이고, 먹고사는 문제보다 급하진 않으니까. 감독님께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멍 때리면서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무지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가님. 정말 죄송해요. 괜히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린다는 게 그만, 작가님을 놀라게 한 바람에.. 정말 죄송합니다. 어떡하죠.. 우선은 제가 감독님께 말씀 이미, 드렸어요."

"예.... 아니에요.... 네... 네... 네???? 네??????????!!!!! 뭐라고요? 감독님께 말씀드렸다고요? 뭐라고 했는데요? 뭐라고 얘기했어요?"

"아니... 그.. 저 때문에 놀라셔서 좀 다치셨다고. 골절이 있어서 2주는 입원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작가님. 아, 정말 매번 일을 그르치는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아, 아아. 어, 괜찮아요.. 일부러 그랬겠어요, 설마. 저는 괜찮으니까. 이.. 이만 거.. 어.. 들어가 보세요."

"아, 저! 감독님께서 이쪽으로 오신다고 하셨는데, 오시라고 할까요?"

"예??????????? 아니, 감독님이 여길 왜 와요! 아뇨, 안 오셔도 된다고, 저 괜찮다고 전해주세요! 꼭이요! 그리고 거, 무지, 아니 아니 저 안온 씨도 얼른 가봐요! 저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아, 네네. 감독님께 말씀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내일 다시 찾아뵐게요.. 정말 죄송해요, 작가님! 내일 뵙겠습니다."

"아니, 내일 왜 와요. 안 와도 돼요. 저 정말 괜찮아요. 아셨죠? 오지 마요!"


가뜩이나 정신없어 죽겠는데, 쪽팔려 죽겠는데. 감독님까지 올 건 없잖아. 정신없는 새를 타고 감독님은 놀라 바로 쫓아오셨고, 대본 수정은 병원에서 해도 되니 괜찮다고 몇 번을 설득한 끝에야 돌아가셨다. 병원에 입원하기로 하자마자 빈이한테 전화해서 노트북이랑 대본에 필요한 것들을 부탁했고, 무지개를 볼 수 있겠다는 무슨 망상을 한 건지 기쁜 마음으로 짐을 바리바리 싸서 가지고 왔다. 오자마자 왜 무지개가 없냐부터 시작해서 온갖 질타를 하고서야 투덜투덜 집으로 돌아갔다.


드라마를 찍지도 않았는데, 벌써 온갖 쪽팔림이란 쪽팔림은 다 당하는 것 같은 마음에 괜히 울컥했다. 괜히 드라마는 한다고 해가지고, 별 일을 다 겪는다는 생각에 왠지 자신이 없어졌다. 온갖 잡생각에 사로 잡혀 잔뜩 우울을 쥐고 있었는데, 또 거짓말처럼 무지개가 떴다.


"저.. 작가님!"

"????????????????????"


'아니, 내가 인제 헛개 보이나, 아까 간 사람이 왜 저깄댜... 어유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닌 거지. 아닌 게야. 나는 분명 엉덩이로 넘어졌는데, 머리를 다칠 수가 있나...'


"작가님.... 작가님! 영원 작가님!"

"??????? 에? 아직 안 갔어요? 왜 아직 여기 있어요?"

"아, 저 그게.. 저, 저 때문에 작가님 다친 거고. 작가님 신경 쓰여서 갔다가 다시 왔어요. 저, 이거요!"


자신 때문에 내가 넘어졌다는 것에 굉장히 신경이 쓰였는지, 나를 안고 오느라 본인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돌아가다 말고, 과일 바구니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정말 환한 전등 사이로 말도 안 되게 무지개가 뜬 듯했다. 내가 대본을 수정하고 작업하는 일을 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다며, 굳이 1인실로 옮겨두고 가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나 보다. 과일 바구니 뒤로, 안온의 매니저가 커피와 각종 음료를 종류별로 냉장고에 채워 넣고 있었다.


"작가님, 작업하시고, 몸조리하시는 동안 불편하지 않도록 제가 신경 쓸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신인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해요! 괜찮아요, 나는 괜찮으니까"

"아니에요, 작가님. 저 이 정도는 충분히 해요. 그러니까 불편해하지 마시고, 편히 계세요. 몸조리하시는 동안 제 매니저가 작가님 케어도 해드릴 거예요. 언제든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아, 저 아뇨. 저 진짜요. 저 괜찮으니까 두 분 나가주세요. 제발요."

"작가님, 죄송해요. 불편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잘못이 크니까 이렇게 하게 해 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저 정말 불편해요. 지금 해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아, 저희 매니저 형이 불편하시면.... 저.. 그럼, 제가 매일 인사드리러 올게요. 그때 필요하신 거 말씀해주세요, 아셨죠?"

"아뇨, 안온 씨도 오실 필요 없어요, 정말. 정말요. 오시면 불편할 것 같아요."

"아뇨, 그 대본도 수정하고 하는 것 때문에, 감독님도 내일 오신다고 하셨고, 저도 그 소연 씨도, 내일 함께 올 거예요. 첫 촬영 관련 미팅을 여기서 하기로 했어요. 작가님 움직이시기 곤란하시니까......"

"아............................."


'아, 젠장. 이 꼬락서니로 미팅이라니. 그것도 병실에서. 아놔.. 환장하겠네. 저 새끼 뭐하는 새끼지 진짜.. 무지개고 나발이고, 무지 개 같네. 아니 진짜 왜 저래. 나한테 원수 졌어? 아놔...'


"저, 작가님. 그러면 쉬세요. 내일 오전에 10시쯤 다 이쪽으로 올 거예요. 그때 뵐게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꼭이요!"

"아.. 네네.. 네!! 가세요! 가세요!!!"

"갈게요, 작가님. 아참, 아까 작가님 X-ray 촬영할 때, 작가님 핸드폰에 제 번호 저장해뒀어요. 꼭 연락 주세요! 그럼, 내일 뵐게요!"


"아, 아무리 무지개라지만... 진짜 이건 무슨 개!!!!!!!!!!! 같... 아니야. 그래도 얼굴 보면, 화가 안나잖아. 화가. 아, 진짜 미치겠네. 아니 뭐 이렇게 꼬이냐고요!!!!!!!!!!!! 앍!!!!!!!!!"

"야야, 네가 고라니냐? 고라니야?"

"어!!!! 할매!!! 네가 여 왜 있노!"

"야, 네가 이렇게 됐는데, 내가 어떻게 안 와보냐.."

"읭? 야, 네가 어째 알고 여기를 오노."

"다~~~~~~ 아는 수가 있지. 야 소문 다 났어. 너 그 안온? 걔한테 안겨서 왔다며? 미친."

"야,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야, 어떻게 알긴. 안온 걔 인스타에서 유명했잖아. 야, 배우 하기 전부터 유명했다고. 심지어 걔네 아버지가 유명한데 어떻게 소문이 안나냐. 벌써 난리야, 뉴스에서. 너 아주~~~~~~~~~ 유명해졌어. 당분간 인터넷 보지마라 야. 아무리 악플 못 달게 막아놨어도, 욕으로 도배가 안될 수가 없어. 알겠지. 당분간 인터넷 보지 마. 인스타 열어보지 마. 알겠어? 디엠 오면은 확인하지 말고, 지워."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기해. 누가 유명해?"

"야, 나자빠진 너를 안고 열심히 뛰어온 애가. 신세* 회장 아들이야. 몰랐다고 하진 않겠지? 네가 아무리 인터넷을 안 해도, 그 정도는 알겠지. 너 인스타는 하잖아. 그렇지. 그리고 쟤 애* 주 모델이었잖냐. 어떻게 모르겠냐, 설마 그치, 친구야? 네가 아~~~~~~~~~~~~~무리 세상에 관심 없어도 말야. 그치? 이렇게 좋은 1인실을 쓰면서 몰랐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돼. 응. 아무튼 디엠 보지 마."


'홀뤼 쓑. 이게 무슨 소리고. 신세* 회장 아들? 애* 모델? 아니, 신인 이래매. 신인이잖아. 도대체가... 아니 도대체 기사가 어떻게 났길래.'



신세*의 아들 안 온, 첫 주연작 작가를 안고 병원까지 달린 스윗남.


신세*의 아들 안 온이, 무명작가에서 이번에 [바람이 불고, 무지개가 떴다] 드라마로 데뷔하는 영원 작가를 방송국 앞에서부터 안고 인근 서울 병원으로 뛰었다. 영원 작가가 갑자기 방송국 앞에서 넘어졌고, 그로 인해 전치 2주의 골절상을 입은 것으로 확인됐다. 더 정확한 것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안 온이 마련한 1인실에 입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드라마 관련한 미팅을 하기 위한 것이며, 1인실은 신세* 일가에서 사용하는 특실인 것으로 확인됐다.



"앍!!!!!!!!!!!!!!!! 이게 뭐야!!!!!!!!!!!!!!!!!!!!!!!!!!!!!!!"

"야, 야야! 인터넷 보지 말라고 했잖아! 야야, 정신 차려. 할매. 야!"

"야.........이게 다 뭔 소리야................. 이게 뭐야!!!!!!!!!! 하.. 쪽팔려서 나 인제 어떡하지. 어떡하냐. 나 어떡해 망구."

"야, 근데 너 진짜 몰랐어? 안 온이 누군지?"

"아............... 내가 아는 건.."

"네가 아는 건?"

"내가... 아는 건......"

"아니 그래 네가 아는 건 뭐!"

"하.... 글마가, 글마야."

"이건 또 뭔 뜬구름 잡는 얘기야. 뭐. 똑바로 얘기해."

"안 온. 그 사람이 무지개라고."

"아니, 이미 주연으로 캐스팅된 건 알아. 뉴스로 이미 다 나왔어. 난또 뭐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무지개. 진짜 무지개가 그 무지개라고."

"? 진짜 무지개가 그 무지개가 무슨..... 뭐?!?!?!?!? 뭐?!?!?!? 아니, 야!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내 소설 속의 그 무지개가...... 안 온, 그 사람이라고."

"야.......... 그니까. 너의 그 무지개 같던 그 사람이. 니 소설 속 주인공이. 실존인물이었다고??????"

"그래.. 글마가, 글마라고."

"아니.. 그럼 진짜 무지개가, 소설 속 무지개를 연기한다는 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하... 나 이거 소문나면 안 돼. 알지. 나 쪽팔려서 못살아. 너 진짜 닥치고 있어야 돼. 알지? 정말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아니, 말은 안 하지, 안 하는데. 와 진짜 쇼킹하다. 망구. 너 진짜 성공했구나?"

"성공이라니. 너는 지금 그딴 말이 나오냐.......?!?!?!?!?!? 야! 나가! 나가!!!!!!!!!!!!"

"오케, 오케! 나 일단 내일 출근이라 먼저 간다. 너 주려고 만든 케이크 가져왔어. 냉장고에 있어, 머리 안 돌아가면 너 케이크 엄청 먹잖아. 부족하면 전화해. 가져다 줄테니까."

"야, 나 살찌면 다 니때문이야. 알제?"

"야, 말은 바로 해라. 때문 아니고, 덕분!"

"야 씨! 꺼져! 야, 나가! 나가!!!!!!!!"

"간다, 가. 저년이, 성질은!! 야, 복숭아 한 개 가져간다~안녀엉~"

"야, 과일 다 가져가!!!! 야!!!"

"내가 올 때마다 먹을 테니까 버리지 마~ 망구! 간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알고 왔는지. 같이 케이크를 만들던 일을 하던 친구가 병원을 찾아왔다. 뉴스 기사를 보고 바로 찾아왔다는데, 결국 안 온이 있나 없나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글이 막힐 때마다 꼭 케이크를 먹었는데, 고맙게도 집으로 케이크를 가져다 주려다가 뉴스를 보고 병원으로 온 게 아닐까 싶다. 원래 과일을 좋아하지 않고, 과일에 초파리가 꼬이는 것에 굉장히 예민해서 과일이 보이면 냅다 치워버리는 탓에, 할매가 과일을 좀 가지고 갔다. 남은 것은 올 때마다 가져간다며, 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갔다.


정신없는 하루가 지났다. 드라마를 찍기로 하고, 그 후부터 꼬인 건지. 애초에 처음부터 꼬여버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엉망진창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괜히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 같아 불편해졌다. 뉴스를 알고 난 뒤부터. 밤새 피곤한 눈을 부릅뜨고, 관련기사를 다 찾아본 듯하다. 안 온, 그 사람에 관한 것들. 정말 이상하게 꼬여버린 것 같은 기분에 연신 이불 킥을 하다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오전 10시에 미팅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바람이 불고, 무지개가 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