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졌네

by maudie



좀 미끄러지면 어때

좀 넘어지면 또 어때

그렇다고 내가 망가지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내가 쓸모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난 지금의 나로 충분해 달라지는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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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면 항상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조졌네'였다. 아마도 다리를 더 이상 다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나고 자라기를 눈이 잘 내리지 않는 구미라는 곳에서 나고 자라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눈을 본 기억이 잘 없다. 기껏해야 질척이는 정도, 웬만하면 진눈깨비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내리자마자 비가 온듯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경기도로 이사 오고 나서는 눈을 참 좋아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자취를 하는 동안에는 고양시에서 지냈는데, 때마다 발목까지 푹푹 들어가는 눈을 밟으며 신나 했던 것 같다. 출근은 뒷전이고 일부러 미리 나가 눈을 한참 밟다가 갈 정도로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눈을 보고 좋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원래 케이크를 만드는 회사에 다녔다. 그리고 그 회사에서 아주 크고 무거운 볼을 들고 설거지를 급히 하고 돌아서 가려던 순간 볼을 안고 그대로 물이 찬 바닥에 미끄러졌고, 한쪽 발목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었다. 하지만 회사는 바빴고, 쉴 수가 없었다. 깁스를 하는 동안에도 나가야 했고, 치료시기를 놓쳤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재작년에 역주행하는 킥보드에 치어 발목 인대가 파열되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다시 넘어지면 안 된다며 무서운 얘길 전했다. 이후로 걸음에 상당히 집중을 하고 걸어야 했고, 눈이나 비가 오면 밖을 나가는 게 무서워졌다.


그리고 며칠 전 엄청난 눈이 내렸다. 우리 동네는 발목까지 눈이 쌓일 정도로 내렸다. 편의점을 가겠다고 잠깐 나섰다가 1분 거리를 10분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물론, 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어쨌든 그 눈을 밟고 든 생각이 위에서 말한 것들이다. '좀 미끄러지면 어때, 좀 넘어지면 또 어때. 그렇다고 내가 망가지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고 내가 쓸모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난 지금의 나로 충분해 달라지는 건 없어.' 사실 나에겐 참 많은 게 달라질 테지만,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게 조금 덜 속상할 것 같아서. 그리고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앞으로의 나에겐 눈이 오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조졌네'일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다른 분들은 그래도 좀 넘어지고 다쳐도 심하게 넘어지는 게 아니라면, 언제든 다시 일어나면 그뿐이니 너무 오래 마음 쓰지 않고, 너무 많이 두려워하지 않길 바라요. 그게 눈이던, 삶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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