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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die Sep 18. 2022

늦은 밤의 독백

계절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일상의 온도가 차가워지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네가 다시 불어온다. 이미 끝이나 버린 엔딩에 억지로 다음 페이지를 쓰려고 애쓰는 내가 너무 안쓰러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마음을 비우기 위해 애를 쓴다.


아팠던 시간 동안은 아픈 것에 집중하느라 몰랐던 그리움이 이제는 좀 살만해졌다 생각하니까 다시 스멀스멀 나에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분명하다. 그 존재감은 감히 눈을 감고 보지 못했다 느끼지 못했다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다. 이제 좀 살만하다 했더니 이제 좀 괜찮아지나 보다 했더니 끝나지 않은 싸움에 내몰린 것처럼 혼란스럽다. 시끄러운 마음이 도저히 조용해지지 않는 밤이 오면, 나는 다시 긴 밤을 겨우 버텨야 했다.


찾아온 불면증은 어김없이 비켜서지 않고 나를 막고 있다. 마음을 뱉는 방법을 몰랐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다시 계획된 기간 동안의 약물 치료를 위해 약을 먹고 나서야 나는 겨우 잠이 들었다. 약을 먹는 동안 닳아진 체력에 나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틀을 내내 잠에 취해 있었다. 찾아온 불면증이 완전히 도망가 버렸다.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몸이 닳고 아픈 동안에 나는 잠시 너를 잊을 수 있었다. 긴 시간 치료를 해오면서 지금까지 꼭 그랬다. 잠시 잠깐 정신을 차리면 너를 그리워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마음을 뱉는 방법을 어쩌면 너에게서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문장을 뱉고 다음 페이지에 다시 문장들을 채우는 것. 마음에 가득 차 홍수가 날 것 같았던 많은 이야기들을 뱉어 숨구멍을 만들어 내는 것이 너를 그리워한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문장을 삼키고 뱉는다. 다음 이야기에는 네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때도 있었다. 언젠간 닳겠지. 내가 무얼 하려고 했는지 방금 떠올린 생각들도 쉬이 잊어버리는 마당에 우습게도 너와 함께했던 것들은 왜 그리 닳지 않고 선명해만 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뱉는 것 말고는 나는 어차피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보고 싶다고 했다.


연락처라고 아는 것 그것 꼴랑 하나 붙잡고 나는 네게 보고 싶다고 말했다. 전해지지 않을 문장에 나를 꼭꼭 눌러 뱉었다. 마음이 닳을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 밖에는 없으니까. 어쩌면 계절이 지나고 다시 또 계절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안다. 나라는 사람은 원래 그렇게 하찮고 미련하니까. 자존감은 그리움이 커지는 만큼 낮아지고 있었다. 너를 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나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전하고 싶었다. 전해지지 않을 마음을.


요즘 밤새 꿈을 꾼다. 꿈은 이런 모습이었다가 저런 모습이었다가 한다. 그래도 가끔은 꿈에라도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찾아온다. 너만 빼고. 선명하던 기억에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제발 옅어지길 바라는 마음도 이제는 들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힌다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잔뜩 비웃어 주고 싶다. 사랑을 믿을 수가 있어야 다른 사랑을 하지 하고.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너를 여전히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하니까. 나는 분명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라고. 남은 사랑은 내게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것에 대해 나도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네가 다시 나를 찾는 다면 나는 니 손을 잡겠다고 했다.


누군가의 물음에 나는 네가 다시 나를 찾는다면 당연히 다시 니 손을 잡겠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많은 시간을 각자의 그림으로 문장으로 채웠대도, 다시 네가 나를 찾기만 한다면 나는 분명히 니 손을 다시 잡겠다고. 내가 뱉은 가장 어리석고 한심한 문장이 되겠다. 그 문장을 뱉은 후에 나는 스스로가 안쓰러웠으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을 꿈꾸고 있고, 여전히 과거에 살고 있는 한심한 사람으로 비쳐 보였다.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와의 이야기는 내가 쓴 자서전에 가장 긴 행복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이 문장들을 나는 또 뱉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매번 쓴다는 것이 곤욕임을 이미 알면서도 노트북을 켜고 앉으면 또다시 같은 문장을 뱉는다. 하얀 페이지가 온통 술에 취한 사람의 가장 애처로운 술주정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 중 모르는 사람에게도 지겨울 정도로 듣고 있는 아주 무서운 이야기. 좋은 사람이 분명 나타날 거야. 모든 것은 잊고 다시 사랑하게 될 거야. 그 말에서 설렘과 기쁨, 기대보다 슬픔과 답답함을 더 많이 느꼈다. 좋은 사람. 도대체 좋은 사람의 기준이 뭘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해야지. 그 말의 무서운 점이 뭔지 알고 있을까. 다음 사람을 만나도 어쩌면 반복될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 눈감고 새로운 문장을 뱉겠다고 가당찮은 꿈을 꾸는 것. 그리고 어쩌면 그다음에도 또 듣게 될 이야기. 좋은 사람을 만날 거야. 좋은 사람. 내게 좋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도. 한순간에 나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다를 뿐. 분명 내게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야기를 한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한다. 그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을 분명 만나게 될 거라고. 좋은 사람이라는 건 기준이 뭘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건데. 내 사랑은 아직 끝났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과연 나는 좋은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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