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udie Mar 30. 2023

다정

하늘을, 그 하늘이 담은 구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한 계절을 집어삼킨 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 사람은 자신의 시선에 닿은 하늘과 자신의 시선에 닿은 그 꽃을 찾아 담아 내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잠시, 잠깐의 호기심.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았던 출근. 별다를 것 없는 하루. 재미없는 일상의 연속.

그렇게밖에 할 말이 없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우연한 메시지. 우연한 확인.

전혀 관심 없었던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호기심, 끝에 그 사람.

사실 정말 궁금하지 않았다가, 명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진정성이 보인 한마디가 나를 이끌었다.


평소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언제부터였다고 하기엔 너무 오래된 일이라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는. 수면 장애를 오래 앓고 있다. 아팠던 기간 동안 아파서 자려고 억지로 잠을 늘렸던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잠은 내 속을 잔뜩 애달프게 하고 저 멀리 사라져만 갔다. 심심해서. 그냥 심심해서 이것저것 호기심으로 가득 채워 줄 어떤 것으로 잠을 대신하곤 했던 것 같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던 그날, 나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핸드폰 상단에 뜬 어떤 어플로부터의 알림. 평소 같았으면 지나쳤을 텐데. 이상하게 궁금해졌다. 심심해서. 그래 그랬다. 그렇게 들어간 어플에서 상대는 자신을 열심히 소개하고 있었고, 나는 그냥 무표정하게 봤던 것 같다. 궁금해서 깔았던 어플. 궁금하지만, 궁금하지 않았던 수많은 메시지. 진정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던 사람들 덕분에 흥미조차 잃었었는데, 그가 보여준 그 진정성 있는 한마디가 나를 궁금하게 했다. 사실, 11년가량 경기도에 살다 고향으로 내려와 아는 이 없고, 고향에만 있었다 한들 아는 이는 없었을 조용하고 파도치지 않는 인생을 살다 30대가 되었고, 많은 연애 실패, 일 - 집, 일 - 집. 누군가를 새로이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 그래서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의미 없어 보이는 사람들 틈 사이로 느껴진 지루.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의 그 말이 안타깝게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왠지 가볍지 않은 투에 나는 연락을 하기로 했다.


한참을 망설였던 것 같다. 사람대 사람으로 소개를 받은 것이 아니어서였을까. 괜히 조금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괜히 연락을 했나 싶다가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문제가 될 것은 없으니까. 심심하던 차에 잘 됐지.라는 마음이 어느 정도 컸던 것 같다. 그렇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신기하리만치 소름 돋게 맞아 들어가는 취향이 나를 아는 사람인가, 오래 알던 사람인가. 아니면 이건 몰래카메라인가. 찰나의 순간에 참 많은 생각이 들곤 했다. 말을 예쁘게 하는 그 사람이, 취향까지 맞다니. 조금은 남들과 다른 취향을 가진 탓에 이것들이 한 가지도 아니고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지기는 참 쉽지 않은데. 그 사람은 그랬다. 좋아하는 음악 취향도, 좋아하는 영화도 드라마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이야기를 했는데,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나눈 이야기가 참 인상 깊었다. 이것 역시 내용 자체를 기억하기보다는 그때의 감정을 기억하고 있는 게 다지만. 


보통은 영화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영화의 줄거리, 특이한 장면. 거기까지만 대화를 했던 것 같다. 그 이상의 대화를 하려고 시도를 하면 상대가 지루해하거나, 내가 나누고 싶었던 포인트를 넘어갔다. 영화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하고 그때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너무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 장면마다의 기분, 그 장면에서의 느낌. 그때 들었던 생각 그것과 관련된 것들을 줄줄이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깜짝 놀라서 사실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 정도로 너무 감동이었다. 누군가와 어떤 취향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토록이나 신나는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너무 오래 몰랐다.


맞춰가는 연애가 아니라 맞춰주는 연애를 했던 것 같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추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지난 연애들을 지나고, 가시밭길에 구른 것 같은 마음 상태와 건강의 문제로 오래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서, 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싶단 생각이 종종 들기는 했지만, 간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나서 이 사람이 내게 상처를 준다면 나도 똑같이 상처를 줄 거다. 이 사람이 내게 바라는 게 이만큼이면, 나는 그 이상을 요구해야지. 더는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싶지는 않다. 마음을 다잡고는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람.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매일매일 같은 온도로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예쁘다 한 것들에 대해 자신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내게 남겨주고, 대화의 온도가 너무 차지도 그렇다고 너무 뜨겁지도 않은 게. 하는 말마다 예쁘게 이야기를 하고 다정하게 하는 게. 상처를 줄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 그 확신이 어디서 어디까지가 들어맞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건 상처를 줄 사람은 역시 아니라는 것.


서른넷을 넘기는 동안 내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많은 촉들이 있었지만, 다 맞아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드는 이 확실하고 안정감 있는 이 생각이 틀리지 않았기만을 바란다. 


만나면 달라질 거야.


3월 초 연락을 시작했던 것 같다. 언제쯤이었었는지는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그 정도. 엄마의 생신이 있었고, 주말마다 바빠서 2주는 그냥 넘겼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내게 건넨 만나자는 이야기에 나는 그리 호의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만나면 달라질 거야. 어느 쪽으로든. 나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가벼운 만남, 가벼운 행동. 정말 질렸다. 만나면 달라질 사람들. 똑같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호기심과 재미 그 이상을 추구하는 이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이유로든 결국은 어플이라는 것은 가볍게 여기기 마련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만나기가 꺼려지다가 매일 같은 이유로 내게 하늘과 꽃을 꾸준히 보여주고, 잘 맞는 대화와, 내용. 사람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고, 그래 뭐 어떻게 되든 한 번은 보자. 그냥 그랬던 것 같다. 


벚꽃이 피는 금오산에서 만날까요.


고등학교 때 꿈이 금오산 사거리부터 금오산 등산로 입구까지 쭉 이어진 벚꽃길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것이었다. 참 이상한 로망을 가졌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늘 걷던 그 예쁜 거리에 나는 서른이 넘는 동안 이상하게도 아무도 그곳에 데려간 적이 없다. 그곳에서 만난 적도 없다. 그랬는데 처음 본 사람과 그곳에서 만난다니. 이게 맞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완벽한 취향과 따뜻한 대화에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낯을 심하게 가리고,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유독 뚝딱 거리는 탓에 사실 처음 만난 누군가와 밥을 먹는다는 것은 체하러 가는 것이고, 만나 종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내게는 조금 불편하고 많이 긴장되는 일이었다. 불편하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금오산 주차장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고, 그 사람은 어차피 같이 가야 하고, 나도 그곳으로 나와야 하니 데리러 오겠다 했고, 음식점을 알아보라는 그의 말에 대충 보고는 있었지만, 말은 하지 못했다. 가서 체하거나 먹지 못할게 분명한데 그 사람이 정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가 찾은 파스타집을 가기로 했고, 고맙게도 그는 그곳에 예약을 해뒀다. 예약을 했다는 말에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일을 해주는 것에 작은 감동이 일었다. 가서 계산은 내가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자리에 나갔다.


도망가지 마요.


그가 도착할 시간보다 먼저 나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시간 맞춰 그가 올 방향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서서 그에게 연락을 남겼다. 그런데, 이미 도착해 있다는 메시지. 나는 다시 주차장으로 걸어 올라갔다. 깜빡이가 켜진차. 쭈뼛거리며 그 차에 다가갔다. 문을 열까 말까. 문을 열면 어떻게 될까. 한참을 망설이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도망가지 마요.라고 했다. 어색해 얼어있던 나는 그 말에 그제야 안도하고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안전벨트를 하니, 그가 이제 갈까요?라고 했고, 그 길로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금오산으로 갔다. 가는 동안 만개한 꽃들이 건넨 인사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어떤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이야기를 이어나가기엔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얼음. 그냥 얼음.


밀린 차들 뒤로 천천히 우리는 주차장에 겨우 도착해 주차를 하고 내렸다. 그리고 나란히 걸었다. 키가 큰 그의 옆을 쭈뼛쭈뼛 어색하지만 웃긴 상황에 나는 옅은 웃음을 띠고 휘적휘적 걸었다. 아무 말이나 했던 것 같은데, 정말 아무 말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어색함이 감돌던 그때 스친 손을 그가 잡았고, 내려가는 돌계단에 힘주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괜히 웃음이 터졌고, 그때부터 어색함은 부끄러움으로 바뀐 것 같았다. 살랑 부는 바람에 묻은 금오천의 향이 코끝에 닿고, 부서지는 햇살에 짧은 윤슬이 아른거렸다. 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서로 견디지 못할 어색함을 뱉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은 편해진 듯도 했다.


어색함과 긴장감에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부끄러움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시간은 흘렀다. 괜히 창밖을 아주 오래 봤던 것 같다. 음식을 다 먹고, 화장실을 다녀왔고, 내가 화장실을 나오자 그가 화장실에 갔다. 


지금이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카운터로 가 그가 나오기 전에 계산을 하고 아무렇잖게 자리로 돌아가 민트를 입에 물고서 틴트를 발랐다. 이제 갈까요 라는 그의 말에 응 가자.라고 몇 번 뱉었는데, 눈치도 없는 그가 카운터로 휘적휘적 가서 계산을 하려고 했고, 직원들이 여자친구가 계산했다는 말에 놀라 웃으면서 그는 내게로 왔다. 


나를 보러 타지에서 운전해서 왔고, 내가 불편하고 피곤할까 데리러 와준 사람에게 밥 한 끼 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참 이상하지. 그게 어쩌면 당연한 건데도. 어쨌든 그 이상하고 어색한 식사가 끝난 뒤로는, 내내 손을 잡고 걸어 다녔던 것 같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이상하게 그 사람 앞에선 촐랑 거리면서 걸었던 것 같다. 넘어질까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너무 선명히 느끼면서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금오산과 동락공원의 벚꽃을 온전히 느끼며 손을 놓지 않고 걸었다.


한참을 걷고, 장난치고. 사진에 벚꽃을 담기도 하고. 꽤 긴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처음 가려고 했던 곳이 문을 닫아 조금 시간이 걸려 우리는 식당에 도착했고, 주문한 음식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저녁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하나 선명한 것은 그가 내게 홍합을 까서 접시에 덜어준 것. 아, 그땐 정말, 이 사람 나를 위해 귀찮은 일을 해주네, 이렇게 다정하네. 꼭 우리 엄마 같다. 이 생각이 스치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와, 우리 엄만 줄. 하고.


점심때보단 편해진 저녁 식사에, 꽤 기분 좋은 배부름을 느끼며, 그의 배려로 안전히 귀가했다. 그렇게 첫 데이트가 끝이 났다. 그리고 그는 만나면 달라질 거라는 내 확신을 와장창 다 깨부수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여전히 변함없이 내게 출근길 예쁜 꽃과 하늘을 담아 보여주고, 이전보다 더 따뜻한 말과 목소리로 내게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얼마나 오래 이렇게 할까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크게 변화가 없이 내내 같은 온도로 내게 이야기를 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안정감이, 너무 좋다.


불편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짜증 나는 아침이 기대되고, 궁금할 정도로.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이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