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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X라이팅 전략이 고민이로소이다

체스를 하다가 든 생각

by Maudie Bloom
In life, as in chess, forethought wins.
– Charles Buxton


지난 초여름부터 체스를 두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체스를 두면 어느새 주변이 고요해진다. 마치 노이즈 캔슬링이 켜진 것처럼 나를 둘러싼 안팎의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딴생각을 멈추기 위해 부러 체스를 두기도 하지만, 체스의 진짜 매력은 거시적/미시적 관점의 전략적 사고를 익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치 앞만 보고 방어만 하느라 급급한 나 vs. 몇 수 앞을 내다보며 공격과 방어를 시의 적절히 발휘하는 나

큰 두 개의 경험을 오가며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만나고, 이번에는 기필코 이겨보겠다며 전진하는 나를 만난다. 그리고 UX라이터로서 갖춰야 할 '전략가 마인드'를 떠올린다. 인터페이스 텍스트를 고도화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라이팅 전략'은 체스 게임처럼 치열하고, 촘촘하다. 그냥 라이터가 아니라 라이팅 전략가로서 체스 판 위의 말들처럼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라이터니까 글만 쓸 줄 알면 돼'하는 세상은 이제 없다.


Ⓒ Freepick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체스게임의 기본 맥락에 비추어보려 했다

요새 00 브랜드의 앱을 분석하고 있다. 전사적인 콘텐츠 개선을 위해 전략이라는 큰 그림을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다. 체스 게임에 비유하면 오프닝 게임 중이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미들게임에 들어설 예정이다. 나는 이 과정을 체스를 두듯 즐기고 있다. 분석 과정을 거치면서 추상에서 구상으로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길 기다린다.


이 게임에서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은 킹은 바로 'UX라이팅 전략가로서 성장한 나 자신'이다. 사실 모든 과정이 순조롭지 만은 않다. 정량화된 근거를 더하고, 빈틈없는 논리를 세우는 일은 당연히 어렵다. 게다가 내가 생각한 방법론과 팀원들이 생각한 방법론이 다를 경우, 상대편 말은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UX라이팅 전략이라는 큰 틀에 몰입한 나 자신이 넘어서야 하는 건, 왜 이 방법이어야 하는지/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를 두고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어찌 보면 클라이언트 상대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이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옹호자보다 반론자가 더 유용하면 다행이지만, '그냥 그러는 거'라면 참 곤란하다.



비숍, 룩, 나이트, 폰, 퀸, 킹

이럴 때 나는 폰이 되어 뚜벅뚜벅 나아가기도 하고, 룩처럼 직진할 때도 있다. 나이트처럼 우회해서 상대를 뛰어넘기도 하며, 비숍처럼 옆구리를 칠 때도 있지만, 퀸처럼 자유롭게 재주를 넘기 어렵다. 각개전투했다가 연합했다가 좌충우돌 팀워크를 발휘해 나간다. 그러다 이렇게 체스게임을 떠올렸다. 지금 이 과정이 체스 판 위의 게임이라면 지금 나는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까? 하는 생각. 솔직히 이 글은 '전략'을 논하는 글이 아니라 '고민'을 논하는 글에 가깝다. 작게는 팀워크를 발휘해 전략을 세우는 과정에서의 고민이고, 크게는 클라이언트가 만족하는 전략을 세워야 하는 고민이다. 둘 다 치열함이 예상된다.




다가올 미들게임에서 승부를 보기 위한 마인드셋


1. 큰 그림(Opening)과 세부 실행(Middle Game)

체스에서 초반 오프닝이 방향을 정하는 단계다. 중앙을 잡을지, 방어적으로 갈지 큰 그림을 세운다. 이후 미들게임에서는 세부 실행이 따라 나와야 한다.

¶세부 실행이 진짜배기라고 생각한다. 클라이언트가 세부 실행계획을 보고 '당연한 거 아닌가요?'라고 하면 실패 아닌가.

ⓘ 보고서 초반에는 전략 방향·비전을 선명히 제시하고, 중반부터는 세부 실행 계획을 풀어내야 한다.
큰 방향 → 구체적 수단의 흐름이 설득력을 더한다.


2. 희생과 선택(Trade-offs)

체스에서 어떤 말을 일부러 내주면서 전체 판세를 유리하게 가져가기도 한다.

¶사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하다. 팀을 대할 때도, 클라이언트를 대할 때도 필요한 일이기에 더 그렇다.

왜 이렇게 머리 쓰면서 사냐 물을지도 모르겠다만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과정이니까 이해해 달라, 지혜를 달라 이렇게 말하고 싶다.

ⓘ 보고서에 모든 목표를 동시에 다룰 수는 없다. 우선순위와 포기할 부분을 정리하면 현실적이고 신뢰도가 높아진다.


3. 상대방의 수 읽기(Anticipation)

다음 수를 예측하지 못하면 불리해진다. 최소 두세 수 앞을 내다보는 게 기본이다.

¶나는 아직 이 전략이 마냥 쉽지 않다. 그래도 챗지피티와 함께 '반론준비'를 하는 과정은 즐겁다. 안다는 착각을 버릴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 길이 비록 어렵더라도 실현 가능한 방안을 계획하는 과정을 즐기는 나라서 또 다행이다.

ⓘ 보고를 통해 설득할 대상이 경영진일지, 실무자일지에 따라 반론이나 질문이 달라진다. 반대 의견·리스크·대안 시나리오를 미리 적어 두면 보고서가 단단해진다.


4. 중복 피하기(Efficiency)

같은 말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면 ‘tempo loss’로 지기 쉽다.

¶맥킨지 논리 책을 보면 MECE를 강조한다. 누락 없이 중복 없이. 글쓰기에서 이 전략은 정말 중요하다. 실행전략도 물론이다. 클라이언트로부터 '이 말이 결국 이 말 아녜요?'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실행 항목을 톺아봐야 한다. 전체를 봤다가, 세밀한 틈을 봤다가 복잡한 사고의 과정 끝에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전략이 나온다.

ⓘ 보고서에 같은 논리를 반복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MECE처럼 겹치지 않는 구조로 짜야 깔끔하다.


5. 엔드게임 사고(Sustainability)

최소 자원으로 승리를 만드는 단계. 오프닝 게임에서 유리했어도 엔드게임 전략이 없으면 비긴다.

¶(자기 암시) 몇 주 뒤면 엔드게임이다. 미리 엔드게임에서 발휘할 전략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본다. 나는 체스게임에서 왕왕 스테일메이트(무승부)하는데, 이제 무승부 그만하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싶다. 모든 말들을 다 내어 주고 싸울 수 있는 말이 몇 개 남지 않은 상황에서의 전략을 치열하게 고민한다.

ⓘ 보고서에는 단기 성과뿐 아니라 장기 지속 가능성(운영·리소스·유지 전략)에 대한 방법론이 담겨야 한다. 생명력 있는 보고서는 '가이드라인'이란 산출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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