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그리는 우리만의 방식

by 정희주

아버지의 첫 기일이 찾아왔네요.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오빠와 저를 앉혀 놓고는 장례를 어떻게 치를지 제사는 어떻게 할 건지 묻곤 하셨지요. 전 이 질문이 너무 고약하게만 들렸어요. 멀쩡히 살아계시는 분이 죽고 난 후를 걱정하는 것이 싫었기도 했고, 돌아가신 이후의 일은 남겨진 자들의 몫일 텐데 이것까지 참견하려 드는 것 같았거든요. 전 이 질문 앞에 "우리가 알아서 해요"라고 쌀쌀맞게 답하곤 했어요. 제가 철이 없었죠. 전 이 말 말 대신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봐 드렸어야 했어요. '걱정 마세요. 염려 마세요. 잘할 거예요. 우리 남매 사이좋게 잘 지낼 거고요. 아버지도 잘 기릴 거예요.'라고 말해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는 난 어리석었어요. 살아 계실 때 깨달았다면 좋았으련만. 부모와 자식의 시계는 이렇게 잘 맞지 않나 봐요.


제사를 어떻게 진행할지 오빠와 의견을 나누던 중 그만 혼란스러워졌어요. 어떤 식순으로 준비하고, 상차림은 무얼로 할지 정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아버지야 천주교를 믿으셨지만 종교가 없는 남은 가족들은 막상 관습적으로 따라야 할 의례양식이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결국 아버지가 어머니 기일을 준비하셨을 때처럼 유교식 상차림에 아버지께서 읽으시던 천주교식 기도문을 짬뽕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몇 가지 제가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를 기릴 수 있는 것들을 준비했어요. 편지를 읽고 애도의 미술을 하기로 했어요.


Bogdanov-Belsky Nikolai - The Church 1939.jpg Bogdanov-Belsky Nikolai <The Church> 1939




아버지, 또다시 가을이 왔어요.

그날 가을의 서늘한 아침 기운, 따뜻한 햇살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히 느껴집니다.

특히 장례식을 치르고 나왔을 때 초록에서 노랑으로 변한 세상 풍경은

너무 낯설어서 마치 잠시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어요.


아버지가 계셨던 날과 가신 날, 그 사이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슬픔과 고통에 많이 울었고 이어 연속되는 후회가 밀려들었습니다.

왜 진작 몰랐을까? 왜 진작 하지 않았을까?

왜 우린 잃어야만 아는 것일까?

왜 이렇게 미련한 것일까 하고요.


하지만 그 후회가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을 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하고요.

이런 후회와 회환도 미련한 저에게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었나 봅니다.

계속 아버지를 추억하겠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아버지와 함께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 교훈 주신 것, 그리고 사랑해 주신 것

그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잘 드려다 보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내가 살아 있고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음을 감사하겠습니다.


이것이 가을의 변화가 제게 일러준 것 같습니다.

이 가을은 제게 앞으로도 너무나 특별할 것 같습니다.


아빠, 이제부터 우리가 우리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기억할게요.




기일-촛불 미술치료.jpg <우리가 만든 빛의 파장이 계신 곳에게 가 닿기를. 그리움 가득한 우리 마음이 계신 그곳에 가 닿기를>, 2020년 첫 기일에


꼬맹이 아이들까지 모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술을 따르고 절을 올렸어요. 이 절이라는 의식이 참 신기하죠. 땅에 엎드리는 의식으로 아버지와 접신하려는 시도를 한다고 생각하니 미신 같기도 하지만, 지금 당장 의지할 것이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간절해지니 말이에요.


또 다른 간절함으로 우리 각자 애도의 촛불을 만들었어요. 명화에 나온 사람들의 모습처럼 LED 촛불에 그리운 아버지를, 장인어른을, 시아버지를,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썼어요. 그리고 돌아가면서 자신이 추억하는 당신에 대해 이야기했죠. 그런 후 그 초를 모아 제기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그 어떤 상차림보다 화려했고 우아했고 정성스러웠어요. 그 어떤 제례 의식보다 우리는 따뜻해졌어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슬픔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전해 졌나요? 우리가 만들어낸 빛의 파장이

느껴지시나요? 그리워하는 우리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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