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을 임해성 Jan 02. 2021

시설 백팔배

詩說 : 주제의식이 같은 시와 단편소설을 함께 읽는 임해성이 창조한 장르

<詩說-시와 이야기의 만남> 백팔배

마음과는 다르게 또 연결이 끊겼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화가 아니라 SNS 서비스 ‘라인’의 무료 전화였다.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중에 라인은 무료로 국제전화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반가운 마음에 라인으로 전화를 하였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전화가 끊겼다.

영빈이 중국 3천 년의 도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서안에서 일본에 있는 여인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전개였다. SNS에서 우연하게 발견한 여인, 아마도 서로를 서로가 발견한 것이었겠지만, 2년 이상 댓글만 주고받으며 바라보기만 하다가 어느덧 조금씩 자신들의 마음 가까이에 서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영빈은 이미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난 다음이었다.

저녁이 되면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또 다른 마음이 꿈틀거린다.
일상에 대한 몰입이 남다른 그는 낮 동안에는 몸에 밴 열정과 오랜 학습과 경험이 낳은 전문성으로 일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방에서 맥주를 마시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녀 생각이 불현듯 밀려왔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생각을 낳으며, 생각이 생각을 낳았으나, 생각이 생각을 낳을 뿐 아무것도 실제로는 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어느덧 휴대폰과 섹스라도 하려는 듯 손길이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아주 없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희망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밀어내고 마침내 한 여인의 얼굴을 화면에 띄웠다.
빈 맥주 캔 하나가 또 휴지통 안으로 구겨진다.

히사카.
한눈에 보기에도 옷 잘 입는 세련된 여성의 모습으로 화면을 채운 히사카는 긴 머리를 날카로운 샤기 컷으로 마무리함으로써 한없이 부드럽고 요염한 눈웃음만을 가벼이 판단하여 어설프게 범접해서는 안 된다는 그 어떤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저토록 맑은 웃음을 입술이 품고 있고, 살짝 내리 뜬 눈이 그토록 깊은 요염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적당한 높이의 코가 남자의 근성을 아주 꺽지는 않으려는 듯이 배려하듯 내려앉아 있다.

핸드폰을 안타깝게 만지작거리던 손이 전화번호를 누른다. 마크 노플러의 롱 로드가 통화연결음으로 흘러나온다. 긴 길의 끝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막다른 골목처럼 음의 흐름을 끊어 놓았다.
잠시 안타까웠다.
음악이 단절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라는, 이 역설적인 안타까움은 참으로 어색한 감정이었다.
“여보세요?’
“영빈입니다”
“아, 어떻게 전화를 다 주셨어요? 지금 해외출장 아닌가요?”
그녀도 나의 SNS를 들여다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 사실이 주는 뒷바람을 타고 영빈의 마음이 일렁인다.
“네, 출장 중입니다.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습니다.”
“목소리가 좋네요. 호호”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얼굴에 미치지 못했다.
오랜 기다림과 설렘 때문이었을 것이지만 여신의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의 목소리로만 들리는 그 목소리 때문에 아까는 잠시나마 안타까웠나 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 지도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영빈은 적지 않게 취한 상태였다. 호텔방이라는 외딴 공간과 밤이라는 비생산적인 시간이 이끄는 대로 맥주를 홀짝인 것이 4캔을 넘어섰고 그렇게 얻어진 엉뚱한 용기로 전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동안의 대화 중에 현실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국제전화 비용이 많이 나오겠네요..”
더 이상 들을 말이 없다는 것인가. 할 말이 없다는 것인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는 것인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거는 것이야 얼마나 나오겠어요…하지만 이제 주무셔야 하겠군요?”
“그래도 국제전화인데요. 라인으로 하면 무료인데…”

아직은 이 인연의 끈을 놓고 싶지는 않다는 신호가 끝이 흐려지면서도 제 할 일을 다하고 숨을 거둔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라인으로 다시 전화를 했다. 가벼운 통화연결음이 적막한 호텔 방의 벽을 타고 흘렀다. 대화 중에는 몇 번이나 중간에 전화가 끊겼고, 그때마다 새로 전화를 해야 했다. 전화가 다시 연결될 때마다 그녀의 모습이 목소리와 더불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출장은 언제까지인가요?”
“내일까지 서안에서 일을 보고 모레 아침에 바로 혜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군요. 일 잘 보고 오세요...”

어떻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짧은 잠을 잔 영빈은 다음 날 일본행 비행기에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내에서도 계속해서 선잠을 잔 탓인지 현실과 몽상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채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자신을 깨운 것은 오랫동안 참아 온 담배였다.
혼자 마신 술의 훈계와 부족한 잠이 주는 형벌과 오랜 이동이 주는 뻐근함과 예기치 않은 만남이 주는 기대와 그 기대를 우습게 넘어서는 설렘으로 뒤죽박죽이 된 몸뚱이를 폐부 깊숙이 돌아 나온 담배 연기가 가려주고 있었다.

언제나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공항 밖은 떠나려는 사람들의 흥성스러움과 돌아오는 사람들의 피로가 은사시나무처럼 하얗게 쏟아지며 진덕이는 늦은 오후의 햇살에 녹아 흐르고 있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도요타 자동차 한 대가 영빈의 앞으로 미끄러지듯이 다가왔다. 하이브리드의 정숙함과 어울리듯이 몸매를 온전히 가릴 수 있을 만큼이나 넉넉한 흰색 블라우스가 보이는 듯싶더니 이내 긴 다리에 매달리듯 걸려 있는 짧은 반바지에 눈이 시렸다. 얼얼하게 하얀 하이힐 위로 숨이 막힐 듯한 몸이 또각또각 영빈에게로 다가왔다.

사진 속에나 있을 줄 알았던 그녀와 드디어 만났다.
영빈은 자신의 몸을 덮고 있을 담배 냄새가 원망스러웠다. 차 안에서는 이미 담배냄새가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웅변하고 있으리라.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둥 마는 둥, 두 사람 모두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색함과 설렘 속에서 그저 잠시 침묵할 뿐이었다.
“차가 좋네요. 전면 계기판도 아주 예쁜데요?”
영빈이는 마음속에서 맴돌기만 하던 ‘예쁘다’는 단어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계속 가슴속에 담아두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낱말을 토해내고는 저 혼자 안도의 약한 한숨을 쉬었다.
“너무 말을 이어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단 숙소를 잡고 한 잔 하시면서 이야기해요.”
그랬다.
늦은 오후의 맹렬한 햇살이 달려가는 저 언덕 너머로 기웃거리던 밤이 찾아오면, 그리고 그 밤이 제풀에 꺾여 스러지기 시작하는 새벽녘이 오면, 영빈은 다시 이 공항에 있어야 했다. 서안에서 바로 혜주로 넘어가는 국내선을 탔어야 했던 영빈이는 어젯밤의 통화를 거쳐 하네다 공항으로 날아왔고, 내일 새벽에는 이 이유 없는 탈선을 복구하듯이 다시 중국으로 날아가야만 했다.

억지로 이어가던 말 길이 끊기자 이번에는 쏟아지 듯 몰려오는 색의 향연에 눈길이 바빠졌다. 전혀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손목과 손마디가 움직이는 모습이며, 액셀을 밟거나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꿈틀대는 허벅지 근육과 안으로만 안으로만 파고드는 반바지가 씰룩이는 모습이 상상과 겹치면서 동공을 확대시킨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을 수 만도 없는 일이었다. 금단의 열매를 두고 애써 고개를 돌리려는 최초의 인간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이 좁은 공간 속에서 영빈의 오감은 희번덕거리며 차 안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마도 히사카의 오감은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을 망정 그녀의 육감은 이 모든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괜히 혼자 정색을 하듯 영빈은 다른 곳으로, 그냥 다른 곳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눈동자를 돌리며 헤매고 있다.

하네다 공항을 부드럽게 안고 달리는 포도 위를 도요타의 하이브리드는 작은 흔들림도 없이 나아갔다. 그러고 보면 비행기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변죽이 들끓는 기류에 흔들리고 필연적인 상승과 하강 속에서 멍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가 막혔던 귀가 뻥하고 뚫릴 때를 위해서는 마른침이라도 삼켜야 하는 불편부당함이 존재했다. 물론 거기엔 히사카도 없었다.
잘 닦인 일본의 포장도로 위는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매립지 위를 쓸어내리는 바람도 차체를 흔들 정도는 되지 못했고, 육중한 교각을 들어 올려 만들어 낸 상승과 하강에서도 먹먹하지 않았으며 답답함을 없애기 위해 마른침을 삼킬 필요도 없었다. 물론 여기엔 히사카도 있었다.

60분.
하네다와 시내는 가까웠다. 히사카와 사내는 아직 멀었다. 그런 물리적, 심리적 거리 속에서 오래였는지, 금방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들이 이미 60분 분량의 과거가 되어버렸다.
쉐라톤 미야코 호텔 도쿄.
하네다 공항의 외딴 지형을 극복하고 바로 이어지는 숱한 빌딩 숲들이 도시의 정체성을 과시하는 거리를 파고들어 마치 오아시스와 같이 갑작스러운 한적함 속에 자리 잡은 호텔에 다가서자 자동차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저속 주행을 위해 엔진을 끄고 전기 모터를 작동시켰다. 다시 정적이다. 조용함이 밀려오자 시야가 어두워진다.
영빈은 비로소 조금 지친다는 표정과 몸짓으로 캐리어를 도어 보이에게 넘겨주고 카운터로 향했다. 히사카는 몇 걸음 뒤에서 그런 영빈의 행동 하나하나를 앳된 호기심과 웃자란 호감이 뒤섞인 눈길로 핥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영빈은 체크 인을 하면서 호텔 안내책자를 통해 무언가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는가를 찾아보았다. 지하 1층에 바가 있었다. 호텔 위층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이라운지와 같이 오랫동안 그녀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곳이라면 가는 동안에 영빈의 심장은 말라비틀어질 것만 같았다. 키를 받아 들고 돌아서며 그녀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잠깐이나마 생각할 수 있는 시공간이 허락된 것만으로도 긴장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M바.
클래식 재즈가 흘러나오고 캔들과 오일램프가 희미하게 비치는 어른들의 아지트. 재즈나 양주 등을 동경하는 외래 지향성이 높아진 일본의 1930년대를 모티브로 현대적으로 변형한 이 바의 가장 안 쪽에 있는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소파와 벤치 시트를 배치하여 개별적인 게스트 하우스의 거실과도 같은 이 공간은 환담과 마음의 평안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가온 웨이터를 영빈은 얼른 쫓아 보내고 싶다는 듯이 뵈브 클리코 빈티지 와인 한 병과 과일과 치즈, 그리고 생햄과 드라이 세서미 소시지와 훈제 카나르로 구성된 콜드미트 세트를 서둘러 주문했다.
피식, 영빈의 입가에 헛웃음이 흘렀다.
이 바에 들어온 이후의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익숙지 않다. 클래식 재즈, 캔들, 오일램프, 와인과 안주들까지도.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 같이 선호도에서 밀리는 조합으로 이루어진 우주에 내던져진 자신은 오로지 한 여인을 위해 지금, 여기, 이 곳에 있는 것이며, 그녀와의 통화에서 알게 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스스로 선택해서 꾸민 지금, 여기, 이 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술을 잘 못한다고 했다. 그녀는 깊은 어둠을 좋아한다며 가장 안 쪽 깊숙한 곳에 어둑하게 자리 잡은 것을 좋아했다. 저녁이 되면 거의 먹지 않는다는 소리와 함께 맥없는 포크질이 두어 번 있고 나서는 딸그락거림 조차도 외로운 홀 울음을 울어야 했다.
그녀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고도 대화를 할 줄 알았다. 좋아하는 어둠 건너편에 웅크리듯 옹송거리는 어깨를 간혹 들썩이며, 간혹 몸을 앞으로 내밀며 영빈의 말과 움직임을 깊은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먹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녀의 눈은 허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소리 없는 웃음이 엇갈리는 공간 사이로 어긋나는가 싶더니 다시 눈길이 만나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그녀는 서서히 마치 수컷 인양 구애 행동을 보였다. 적어도 영빈이 종합한 정보들은 모두 확실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취하면 잠을 잔다는 말을 한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의 고개가 자꾸 떨구어졌다. 술이 약해서 미안하다며 과장된 몸짓을 하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그라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동안에 영빈은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괜찮냐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힘 없이 영빈에게로 기대어 온 히사카의 얼굴이 영빈의 목 언저리에 닿았다. 얼굴이 목 언저리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 부드럽고 끈적한 히사카의 혀와 입술이 영빈의 목을 따라 움직였다.
곤란한 일이었다.
재즈나 양주 등 외래 지향성이 높아진 1930년대의 일본과도 같은 허위의식을 가지고 동경으로 날아온 영빈에게는 기대가 놀랍도록 빨리 현실이 된 것이 오히려 곤란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내놓지 않는다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듯이 그녀가 던지는 전 존재를 받아들이기에는 그가 느끼는 것과 그녀가 느끼는 것 사이의 시차가 너무 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시차를 히사카의 혀가 다시 밀고 들어왔다. 영빈의 목을 따라 부드럽게 그리고 때로는 강하게 휘몰아치는 혀의 일탈을 말리기는커녕 그녀의 입술은 혀를 이끌며 이미 배덕의 선봉에 서 있었다. 입술이 머무는 자리 위로 뜨거운 용암 덩어리가 화끈거리며 꿈틀거린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영빈의 성격이 아니었더라면 술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어른들의 공간은 그야말로 어른들의 공간이 되었을 것이었다.

영빈은 조용히 달래듯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단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 좋겠다고.
일단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무책임한 단어이다. 깊은 고민 없이 우선 움직이고 보자는 식의 ‘일단’이라는 단어가 이끄는 행동은 중추신경계의 지시를 따르기보다는 자율신경계의 지시를 따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아마도 영빈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과장되게 비틀거리는 히사카를 데리고 바를 빠져나와서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자신의 방 이외에는 없었다. 히사카를 데리고 영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그녀를 뉘었다.

시간은 이미 11시가 넘어가고 있다. 히사카의 옆에 영빈도 그대로 누웠다. 잠시 거친 숨을 몰아 대던 히사카의 숨결이 잦아드는 동안에도 영빈은 혼란스러웠다. 히사카는 왜 이렇게 오늘따라 서두르는 것일까. 마치 다시는 못 볼 사람을 만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쫓기듯이 집착하는 것인가. 영빈은 몸을 일으켜 히사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예뻤다. 영빈은 고개를 숙여 히사카의 입술을 찾았다. 처음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열렬한 환영의 몸짓으로 그녀는 그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긴 키스를 마치고 나자 히사카의 낮은 목소리가 방안을 울린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랬나? 어젯밤 취중에 우리는 이미 오늘 밤 호텔에서 함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단 말인가. 그리고 이내 지키지도 못할 약속까지 했더란 말인가. 영빈의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할 뿐 전혀 돌아가지는 않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알았어, 오케이. 얼른 자자. 나 내일 새벽에 나가야 하니..”
어느새 말이 편해진 만큼이나 몸도 편했어야 했는데,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영빈이 몸을 바로 뉘우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나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 이번에는 영빈의 마음이 몹시도 불안해졌다. 어쩌면 정말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영빈의 심장이 폭주하더니 이내 몸을 일으켜 히사카의 입술을 찾는다. 둘의 키스는 그렇게 한 동안 길게 이어졌다. 숨이 막힌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영빈을 밀쳐낸 히사카의 목소리가 목을 찢고 나온다.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해 놓고서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시험하나. 영빈의 몸속에 피와 함께 흐르는 알코올 때문인지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다시 ‘일단’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영빈이 거칠게 히사카의 입술을 찾아 키스를 하려고 한 순간.
“아, 너는 진짜… 나쁜…”
재차 히사카의 목소리가 거부의 의사를 드러내기 직전, 영빈은 자신의 몸을 바로 누이며, 말했다.
“알았어. 약속은 지킨다. 진짜로 자자..”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정당하는 일 따위를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죽기를 각오하고도 여린 인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남자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치환하는 불쾌함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히사카가 저러는 것이 취기 때문이든 의지 때문이든 자신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에서 관계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히사카 자신도 어젯밤에는 스스로의 마음을 단속하면서 내게서 확답을 받았을 것이지만, 막상 만나서는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다른 길로의 내달음을 막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창 밖이 뿌옇게 탈색되어 간다. 소화하지도 못할 것을 삼킨 끝에 버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그 먹은 것을 토해내는 지구의 역류성 식도염. 그렇게 순수한 암흑의 배경을 더럽히며 버짐이 번져가듯이, 벽지가 조금씩 바래듯이 어둠을 비집고 희멀건 새벽이 꼼지락거리고 있다.
창 밖을 보았다.
박자를 맞추듯 주기적으로 덜컹거리는 상하운동에 맞추어 창 밖의 풍경들이 흔들리며 뒤로 달려가고 있었다.
응? 뭐지?
영빈은 혼란스러웠다. 하늘의 풍경이 보여야 할 것인데, 창 밖의 풍경은 어둠에 젖어 묽을 망정 땅의 풍경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영빈이 머리에 손을 갖다 대자 모자가 손에 잡혔다.
모자?
모자를 벗어보니 군모였다. 작대기 세 개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상병.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급격하게 내닫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과는 다르게 느리게만, 느리게만 굴러가는 뇌를 흔들어 깨워야 했다.
히사카.
대학 1학년을 마칠 때쯤 서울로 친구와 같이 배낭여행을 왔을 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우연히 영빈의 여자 동기와 만났고, 그래서 대학교에 구경 왔다가 영빈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3일인가 4일인가를 함께 어울리며 친해졌다면 친해졌을까. 그렇게 즐거운 시간이 지나서 그녀는 일본으로,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영빈이 입대를 했다.
오랫동안 편지가 서로를 이어주는 끈이 되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 중인 영빈에게 중대본부에서 호출이 왔다. 일본에서 면회를 왔다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면화를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부대가 난리가 났다. 부대 입구의 위병소에서 히사카를 보았을 때는 정작 영빈도 무척이나 놀랐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서울도 아니고 이 곳까지 일본에서 찾아오다니..
히사카도 부대까지 주소 하나 가지고 찾아오느라고 고생이 많았던 것 같다.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시외버스와 시골을 투덜거리며 오가는 노선버스를 갈아타면서 용케도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내로 들어온 히사카를 데리고 이곳저곳 간단하게 한국의 군부대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었다. 영내 법당에 도착했을 때 히사카는 들고 있던 가방과 짐들을 한쪽에 내려놓고는 불상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멤버 한 사람과 영빈이 닮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 먼 곳을 오나…
한국에 왔을 때 영빈이 보여준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 먼 곳을 오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알면 알수록 영빈이 좋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 먼 곳을 오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법당을 둘러싼 풍경만이 무심한 바람이 치고 가는 대로 흔들리며 울었고, 한 번의 고개 숙임을 마치고 일어설 때마다 히사카의 뒷모습이 온전한 모습으로 영빈의 동공을 채웠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이 묵직한 침묵 속에서 지나가는 동안에 영내 장교들의 판단이 섰나 보다. 외국인이 면회를 온 것도 처음인 데다가, 주말도 아닌 주중에 면회를 왔으니 외박은 허락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히사카는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한 웃음을 지었다. 면회를 오면 외박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나선 한국행이었다. 그럴수록 외박이 안 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아무런 심경의 변화도 이끌어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빈만 안타까웠다. 그러나 영빈의 마음도 육욕이 아니라, 그 먼 길을 달려온 열도의 여인과 조금이나마 더 오래 함께 하며 그녀의 용기와 행동에 대한 감사라도 표하고 싶은 것이었다.
오래 보지 못했고, 어떤 진도도 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입대를 했고, 오늘처럼 급작스러운 장면과 상황에서 잠깐 이루어진 면회를 끝내고 부대 입구의 위병소에서 보낼 때에 영빈은 바보 같이 조심해서 가라는, 잘 가라는, 다시 보자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돌려보냈다. 멀대같이 키가 큰 히사카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뒤척임이 길었다.
2시간마다 교대를 하는 불침번을 깨우는 소리, 그들이 옷을 입는 소리, 교대한 불침번들이 옷을 벗는 소리, 옷을 벗는 소리, 옷을 벗는 소리…그리고 그들이 잠드는 소리…
뒤척임이 길었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혜주를 가려면 심천공항에서 내려야 한다.
도착을 알리는 기내방송이 들려온다. 영빈이 찡그리며 창 밖을 내다본다.
불면의 밤과 개운할 것이라고는 없는 찝찝함이 선물한 뻐근함으로 가득한 몸을 한껏 늘려본다.
상전벽해의 상징, 괄목상대의 증거. 중국 경제발전의 첫 용트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심천의 관문, 백운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는다. 여기서 혜주까지는 다시 60분을 달려야 한다.
불과 하루 전에 히사카와 함께였던 60분과는 너무 다른 60분간의 미래가 확정되어 있었다.
이미 늦은 오후의 햇살이 익숙하게 잡아 먹힐 준비를 하듯 눈에 힘을 빼고 내리 깔기 시작한다.
군복이 아니라 양복.
한국에서가 아니라 일본
히사카가 온 것이 아니라 영빈이 간 것.

두 번째의 만남에서도 아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이런 말은 말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육욕의 교환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고 치부하는 것은 말이 아니다.
비행기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이동해서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출렁이며 달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그 긴 시간을 달려와서 고작 2시간 정도 영빈을 만났을 때의 히사카의 절실함이 그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제대 후에 연락이 끊겼다가 2년 전에야 SNS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녀의 목소리에 끌려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새벽에 다시 길을 나서야 했던 영빈의 간절함이 그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중국 정부는 영빈과 히사카를 이어주는 SNS를 중국 영내에서 용납하지 않았다.
라인으로 몇 차례 통화시도를 해 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히사카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전파가 닿지 않는 곳에 있거나,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할 수 없습니다..”
기다리던 여인이 아니라, 차가운 여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일본이나 중국은 한국과 달리 언제, 어디서나 통화를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마음과는 다르게 또 연결이 끊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