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글로리
지난주 금요일 퇴근 인사가
'더 글로리 잘 보고 와'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21세기 모래시계였던 더 글로리의 파트 2.
'무섭도록 잘 썼더라'는 김은숙 작가의 이야기가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어찌나 쫀쫀한지,
나까지 긴장하며 숨 가쁘게 막 달려가서
아 이제 다 끝났겠구나 싶으면
아직도 3화 남아있어? 하는 게 몇 번이었는지.
미친 대본 미친 연출 미친 연기가 만나는 게
진짜 보통 일이 아닌데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여기부터는 스포 천지입니다. 스포 싫으신 분은
시청 완료 후 읽어주세요)
더 글로리엔 각종 '지옥'이 나온다.
폭력으로 18살 이후 내내 지옥에 갇혀 살아온 동은은
가해자들에게 하나씩 지옥을 선사하고,
또 자기처럼 지옥에 갇힌 여정 선배와 이모님을
구원하는 복수의 신이 되기도 한다.
가해자들은 죽어서 혹은 살아서 지옥에 갇히는데
지옥으로 가지 않은 자들은 결국
누군가를 돌본 이들이다.
복수만을 생각하며 맹렬히 달려오던 그 시간에도
에덴빌라 할머니를 살렸다.
삼각김밥을 먹으며 영양실조로 쓰러지던 시절에도
소희를 기억하고, 소희 어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마음을 돌봤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채 이 복수극에 휘말린
다음 세대(선아와 예솔이)에게는
새로운 삶을 주고 진심으로 사죄하며
그들을 철저히 보호한다.
여정 선배를 철저히 쓰임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여정 선배의 아픔을 알고 나서는
면회 다녀온 선배를 어색하지만 꼭 안아준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보호받고 돌봄 받지 못했지만
동은은 돌봐야 할 사람을 돌본다.
그리고 그 복수극의 끝에서,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기 시작한다.
목 끝까지 꽉 채운 단추를 조금 열고,
더운 날에는 소매도 걷어올리고,
무엇보다 수단이 아닌 내 꿈을 위한 공부를 하며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한다.
'돌봄'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이 극의 엄마들은
그러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말할 필요도 없는 동은의 엄마부터,
자식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자신보다 중요하진 않았던 연진의 엄마,
그리고 '우리 강아지'를 끔찍이 생각하던 연진까지.
그나마 현남이 선아를 돌보았지만,
지옥 같은 결혼을 선택하고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시간들로 인해
선아를 보호하지만 함께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는 못한다.
예전에 개그맨 이경규가 했던 말 중에
진짜 인상 깊은 말이 있다.
자신은 아내보다 딸이 더 무섭다고.
자기가 뭘 잘못하면 아내에게는
그래도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딸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던 말.
부모가 되는 것의 무서움은,
자녀 앞에서는 망가질 권리도 무너질 권리도 없다는 것.
자녀가 스스로 박차고 나갈 때까지
자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환상의 존재로
버텨주어야 한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부모는 권위를 잃고
부모에게서 권위를 찾지 못한 자녀의 방황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아이를 키우는 건 근본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일이다.
자꾸만 나의 그 시절과 마주치는 일이다.
연진과 연진의 엄마가 자꾸 '앞만' 보는 것은
그들이 아이들을 돌보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굿판에서 무당이 죽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샤머니즘을 진짜로 믿는 것과 상관없이
신이라는 존재가 가진 메타포를 생각하면
신은 돌보는 자, 굽어살피는 존재이다.
굿판이 정의롭게 정직하게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로하며
돌보는 장으로 사용되지 않자
그동안도 많은 죄를 지어오던 무당이 바로 죽는다.
굿판을 의뢰했던 동은이 무당의 빙의와 죽음을 보며
눈동자가 흔들린다.
자신이 시킨 게 아닌데 소희의 빙의된 무당을 보며
한편으론 무서웠을 거고,
신은 없다고 늘 되뇌던 동은이
한편으론 신마저 나의 복수를 돕는구나,라는 생각에
어쩌면 위로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더 글로리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바로 공간이다.
동은의 수단으로써의 꿈(교사)이 아닌
진짜 꿈은 건축가였고
모든 복수가 끝나고선 건축 전공으로 대학원에 갔다.
연진과 도영이 동은의 집에서 만나는 장면을 볼 때
동은의 시선은 구두에 머문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구두를 단정히 벗어
자신의 방에 들어온 도영을 보며
연진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한다.
파트 1에서 어린 동은의 단칸방에
가해자들이 신발을 신은 채 들어오던
그 발이 동은의 눈에 클로즈 업된 것과 겹친다.
엄마가 자신의 안전한 공간에 무단 침입해
남자를 불러들이는 것도 모자라
불까지 내며 공간을 없애버리려 할 때
엄마에 대한 동은의 모든 감정이 폭발한다.
어릴 적, 자신과 상의 없이 방을 빼버린 엄마가
이렇게 또 자신의 공간을 없애버리자
동은은 엄마에게서 '자신만의 공간'을 뺏어버린다.
병원에 갇힌 엄마에게 자신의 공간은 없을 테니.
타인을 기만하는 공간을 구축하던 연진과 재준은
(각각 다른 의미로) 공간에 갇히게 된다.
여정 선배의 집에 가서도 침대를 들이는 대신에
텐트를 치는 모습을 보며
동은이 얼마나 평온한 자신만의 공간을 원했는지
간절히 와닿았다.
시간이 흘러, 동은에게 자신만의 방이 생겼을까
꼭 그랬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극에서 죽은 남자들(재준, 명오, 경찰청장, 현남의 남편)은
모두 성범죄자들이다.
현남의 남편은 가정폭력 장면만 나오지만
그 과정에서 부부강간이 없었을 거라 기대하긴 어렵다..
너무나 당연히, 성폭력은 '성욕'에 의한 폭력이 아니며
철저한 권력형, 위계형 폭력이다.
인간이 가진 가장 마지막 경계이자 공간인
신체와 성에 무단으로 침입함으로써
상대에 대한 나의 힘을 확인하는
가장 잔인하고 또 비열한 폭력일 뿐이다.
가장 보호받아야 할 마지막 공간을 침범한 자들에게
자비는, 없다.
동은이 짜놓은 복수의 판은 거대하고 엄청나다.
이 판대로 움직여주는 사람들을 보며
동은은 인간이 아닌 복수의 신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엄청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하지만 인간인 동은은,
'신은 없다'라고 늘 되뇌던 동은은 알고 있다.
자신이 짜놓은 이 모든 판이
결국 자신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음을 말이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던 동은은
자신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판을 이끌어가며
수없이 많은 조력자를 만난다.
특히 서로가 서로의 구원자가 되었던
현남이모와 여정 선배는
동은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부모'이기도 하다.
동은의 생각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모든 가해자들이 파멸을 맞이하고 난 후
동은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려 한다.
그러나 또 여러 사람의 도움과 시간을 통해
동은은 알게 된다.
자신의 복수는, 가해자들의 파멸이 아니라
그 지옥에서 나와서, 나만을 위해 살아갈 때 완성됨을.
동은은 그래서 자신의 진짜 꿈을 위해 대학원에 가고,
목 끝까지 항상 잠그던 단추를 조금씩 열고,
날이 좋은 날에는 팔을 걷어붙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흉터 위에 자신만의 문신을 새긴다.
진짜 나를 돌보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
아마 동은은 김밥은 가끔 간식으로만 먹으며
자신을 위한 식사를 즐기고 있을 테고
그의 오랜 꿈이던
자신만의 안락한 방을 갖게 되었을 것 같다.
결국 드라마는 진짜 복수란
잊을 수 없는 이름을 흉터처럼 갖고 있던 삶에서
흉터 위를 내 방식대로 가꿔나가는,
너에게서 벗어나 진짜 나에게로 가는
긴 여정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