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아이와 나의 바다, 아이유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떤 노래를 듣는데,
노래 안에서 접속사가 또렷이 살아 움직이는 경험.
접속사가 자꾸 내게 말을 거는 경험 말이다.
그러나, 라서 사랑하지 못한 시간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일들이 있지
내가 날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서
맘이 가난한 밤이야
거울속에 마주친 얼굴이 어색해서
습관처럼 조용히 눈을 감아
밤이 되면 서둘러 내일로 가고 싶어
수많은 소원 아래 매일 다른 꿈을 꾸던
우리가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쓸 땐,
논리적으로 응당 오길 기대했던 것이
오지 않을 때 쓴다.
이걸 우리 마음의 이야기로 적용해 보면
여기서의 논리는 나만의 주관적인 논리가 된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너는, 그리고 나는
'그래서'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왜 어째서 자꾸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건지.
'그래서, 나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았습니다'인
내 이야기가 엉망이 되어버린 것 같을 때.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그 이야기들에
우리는 또 얼마나 숱한 가난한 밤을 보냈는지 모른다.
남들은 다 '그래서'로 이어진 매끈한 서사 위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나만 '그러나'로 얼기설기 꿰맨 서사 위를 걷느라
고단하고 또 지쳐버린 것 같은 때.
그저 우리는 두 눈을 감아버리고
어서 내일이 오기를,
아니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겨우, 라서 화해하지 못하는 시간들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걸까
쌓이는 하루만큼 더 멀어져
우리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
우리는 모두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고 싶어 한다.
온갖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내가 겪는 이 말도 안 되는
모든 시간들을 다 납득하고 참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이 시간들이 의미가 없는 거라면
나는 지금 이 시간을 견뎌낼 힘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견뎌내온 시간의 결과가
결국 나라니. 겨우 나라니.
주변의 시선, 실망, 조롱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힘든 건 실망한 나 자신이다.
그 누구보다 맹렬히 나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때로는 있는 힘껏 나를 모른척하느라
그렇게 나는 나와 화해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럼에도,라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들
세상은 그렇게 모든 순간
내게로 와 눈부신 선물이 되고
숱하게 의심하던 나는 그제야
나에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물결을 거슬러 나 돌아가
내 안의 바다가 태어난 곳으로
휩쓸려 길을 잃어도 자유로와
더 이상 날 가두는 어둠에 눈 감지 않아
두 번 다시 날 모른 척하지 않아
그럼에도 여전히 가끔은
삶에게 지는 날들도 있겠지
또다시 헤맬지라도 돌아오는 길을 알아
내가 나를 미워할 만큼 미워해서
도무지 돌아갈 수 없다고 여기게 되는 그 막다른 곳에서
우리는 뜻밖의 나를 만나게 된다.
내가 나와 화해하지 못하면
나는 나의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를 만난다는 것은 결국,
내가 나에게 좀 더 친절히 그리고 끈질기게
대답하고 또 설득하는 것이 아닐까.
확신하지 못해 방황하는 나.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미워하며
자꾸만 도망치려는 나.
그런 나를 모든 사람이 등 돌릴 때,
결국 다시 돌아와 아는 척하는 나, 만이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다.
그 모든 방황과 이별과 망설임의 시간이 지나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럼에도 계속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만난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많은 순간 초라하고, 좌절하고
그래서 삶에게 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끈질기게 스스로에게 친절하며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게 된 나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힘을 갖게 된다.
마음속에 나침반을 품게 된 삶은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게 되니까.
그래서 삶은,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들이
나와 화해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