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것. 밍기뉴
석사 때쯤인가. 본격적으로 상담 공부를 시작하면서 몰아치듯 내 마음과 머리로 들어오는 각종 상담 이론과, 수련을 위해 계속 받는 상담들에 지쳤던 어느 날. 이미 이 과정을 거쳐온 한 선배 상담자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선생님. 저는 다른 사람 마음에 있는 돌 치워주려고 상담공부를 시작했는데요
정작 제 마음속에 있는 돌 치우다 죽을 것 같아요."
그때 그 선배상담자가 했던 말과 눈빛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도 그래. 근데 그렇게 내 마음속에 있는 돌을 치우다 보면
남의 맘 속에 있는 돌도 하나씩 치우게 되더라."
그 후로 십수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이 말은 내게 깊게 새겨진 이정표로 남아있다.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또 헛된 구호일 수 있을지. 그 어떤 것도 나를 위한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쩌면 나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한다.
남을 위한 삶, 이 어떻게 나쁜 거냐 말할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리고 많은 경우는,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나를 돌보는 삶을 잠시 피하고 싶어 남을 돌보는 자리로 가곤 한다. 이건 특별할 것도, 특별히 나쁠 일도 아니다.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지독히도 자신의 안위와 안녕을 향한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가장 무겁고 그래서 직면할 수 없는 돌은 다르고, 그 돌 중 하나는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나를 마주하는 일이다. 그런 내 모습에서 피해있을 수 있다면 인간은 때때로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상담에 오는 내담자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가지고 온다. 처음 상담에 와서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나눌 누군가, 그것도 전문가가 있다는 것이 주는 안정감이 자신을 나아지게 만들고 실제로 눈에 띌만한 변화와 치유가 일어난다. 하지만 그렇게 소위 말하는 '상담 허니문' 기간이 끝나고 나면 그 후부터는 끈질긴 싸움이 시작된다. 바로 나아지지 않는 나를 계속 어르고 달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고 가야 하는 긴 시간 말이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잘 표현한 노래를 어느 날 만났다. 밍기뉴의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것>이다.
난 모든 게 너무 지쳐서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왜 나는 나아지지가 않는 걸까
오늘도 혼자 우울해하고 있는 나인데
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가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건
아파하는 나를 또 달래줘야 하는 것도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인 것 같아
너무나 외로운 삶인 것 같아
너무 난 외로운 사람 같아
난 더 이상 아무것도 큰 위로가 안 돼서
기대조차 안 하려 했었는데
왜 내게 자꾸 사랑을 안겨다 주는 걸까
나는 돌려줄 수도 없는데
나아지지 않는 날 곁에 두고 사는 건
아파하는 나를 또 달래줘야 하는 건
틈만 나면 우는 날 안아줘야 하는 건
너무나 고된 일 일 거야
너도 날 불쌍히 여길 거야
너무 난 외로운 사람이니까
상담에서 보통 종결의 때를 알리는 몇 가지 시그널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내담자가 스스로의 상담자가 되어줄 수 있을 때, 이다. 스스로의 상담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언제나처럼 찾아온 감정과 사건의 격랑 안에서 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지만, 동시에 거기서 빠져나와 그러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담자가 그러했듯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며 시선과 조망을 넓히고 다른 식으로 느끼게 해 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의 상담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담자들은 종종 했던 얘기를 또 상담실에 가져오며 민망해한다. 혹은 절망한다. 이만큼 했으면 이제 이 문제에서는 넘어지면 안 되는데, 저는 왜 또 같은 장면, 같은 돌부리에서 걸려 넘어질까요. 그냥 다 그만두고 싶어 진다. 그때 상담자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이번엔 어떤 일이었는지, 지난번과 다 똑같은 것 같지만 이번엔 조금이라도 어떻게 다르게 대처하고 생각했는지 함께 섬세하게 살펴본다.
지난번이랑 똑같은 문제에 힘들어하지만 이번엔 힘들어하는 시간이 더 짧아졌네요.
지난번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그래도 일상을 잘 마쳤네요, 비록 울면서 했더라도 말이죠.
상담에서 이 정도 이야기하려면 스스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다 관찰했다는 건데,
이젠 스스로를 모니터링하는 힘도 생겼네요.
그러면 내담자는 어떻게든 달라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산다는 것은, 나아진다는 것은, 내 삶에 어려움이 하나도 없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데서 넘어지는 나를 일으켜 세워 흙 탈탈 털어주고 다시 손잡고 걸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또 넘어진 내가 바보 같지만, 사실 우린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계속 넘어질 예정이다. 삶이라는 게 굉장히 새로운 배경이 계속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젠 우리도 알고 있다. 또 넘어졌지만 그런 나를 포기하지 않고 손잡아주는 나, 그리고 때때로 만나는 너의 사랑이 너무 외로운 삶이 그래도 조금만 외로운 삶이 되게 한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날 데리고 사는 이 번잡스러운 일을 그래도 우리는 놓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