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올 초. 코로나가 엔데믹으로 전환되는 분위기 속에 침체되었던 극장가를 부활시킨 일등공신은
바로 이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였을 것이다.
슬램덩크의 황금기를 함께 보낸 어른들에게는 향수를 주고 영원한 클래식을 알아본 어린 세대에게는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한 외국 애니메이션 중 최고 흥행을 기록하였고, 그 이후 농구붐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사실 나는 슬램덩크의 황금기에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슬램덩크의 만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당시 나는 항상 친구들이 가지고 다니는 캐릭터 강백호만 봐서 이번 영화에서 실물(!) 강백호를 처음 보기도 했을 정도이다.
이게 내가 아는 강백호의 전부였다. 그래서 사실 제대로 된 비율의 강백호를 보고 처음엔 적응이 어렵기도 했다...
그래서 내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추억의 영화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였고, 그래서 어쩌면 굉장히 프레시한 시선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여러모로 훌륭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제게 가장 마음에 남은 이야기는 바로 이번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인 송태섭과 그의 형,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알아보니 원래 슬램덩크에서 송태섭은 그렇게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라고 했다. 1학년인 강백호와 서태웅의 라이벌 구도나 정대만과 안감독님의 찐한 사랑(!), 3학년인 안경 선배와 채치수의 이야기에 밀려 홀로 2학년인 송태섭은 그리 전면에 나서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런 그가 이번 영화에서 전면으로 나서며 그가 어떻게 송태섭이 되었는지에 대해 관객들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이야기들을 따라가면 나는 그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주장'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어린 태섭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런 그가 몇 살 위의 형에게 농구를 배우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마도 자녀들에게 썩 괜찮은 존재였던 것 같은 그의 아버지의 부재는 장남인 송진섭으로 하여금 가족이라는 팀의 '주장'을 맡게 한다. 그리고 진섭은 그 주장 역할을 꽤나 훌륭하게, 어울리게 해낸다.
특히 농구에 특출 난 재능을 보이며 장차 농구선수로 성공하고 싶은 꿈까지 가진 진섭은 태섭에게 정말 좋은 주장이다. 이런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이러이러하게 해야 해,라는 말뿐인 지시가 아닌 태섭과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코치하며 태섭과 함께 한다.
그러니까, 주장으로서의 진섭은 거대한 비전만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비전이 생생한 현실로 실현되도록 구체적인 고통에 함께 하는 사람인 셈이다.
그랬던 진섭마저 사망한 후 태섭은, 그리고 다른 가족 모두 방황하지만 그 와중에도 태섭은 어떤 식으로든 농구를 놓지 않는다. 허망한 비전이 아닌, 체온과 땀이 느껴지는 생생한 코치는 우리 마음과 몸에 깊이 각인되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장이 된다는 것은 결국 온전한 주도성을 회복함을 의미한다. 거대한 비전만으로 굴러갈 수 없는 팀을 위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아주 현실적인 그리고 애정 어린 눈으로 끈질기게 나를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관찰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나에 대한 치밀한 훈련 계획을 세워야 한다. 수면부터 식사, 취미, 공부까지 전적으로 나를 위한 코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훈련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너무 큰 좌절이나 부상 없이 계속할 수 있도록 옆에서 끈질기게 격려해야 한다. 이 모든 역할이 바로 주장의 역할이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를 방치하고 싶어 진다. 맘에 안 드는 나를 그냥 두고 싶고, 잠시 눈을 돌리면 알아서 괜찮아졌으면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도 애정 어린 조언을 하면서 내게는 누구보다 혹독하고 가혹하다.
하지만 내가 나의 주장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를 책임지고 이끌지 않는다. 현실에 단단히 두 발을 붙이고 아주 작은 변화와 성장에도 기꺼이 반응하며 나에 대해 그 누구보다 큰 애정을 보내는, Big Fan of My Life. 그게 바로 삶의 주장일 것이다.
영화 말미에 태섭은 미국 대학에서 뛰는 선수가 된다. 하지만 제게 그보다 더 찐한 결말은,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음 해에 북산고 농구부의 주장이 되었다는 것. 더 이상 형의 그늘이 아닌 진짜 주장이 되어 스스로의 성장을 책임지는 존재가 된 태섭의 결말이 참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