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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방 Jul 10. 2023

머물게 하는 슬픔도 질주하는 화도, 모두 나야

[영화] 엘리멘탈




불과 물, 공기와 흙처럼 우리의 세계를 이루는 원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 <엘리멘탈>은 마치 이과생이 쓴 동화 같기도 하다. 이 원소들의 기본 원리를 알아야지 이 영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계 미국인인 피터 손 감독이 쓴 이 영화에는 동양인의 정서, 정확히는 한국인의 정서가 듬뿍 담겨있다. 그래서 영화 초반의 다소 늘어지는 느낌은 한국인은 탁, 하고 알아들을 이야기를 서양인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하는 이방인의 안쓰러운 고군분투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를 포함합니다)


이 영화를 보는 방법은 크게 둘일 것이다.


첫번째 언급한 한국적 문화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엠버가 K-장녀라는 것은 아마 한국인이라면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아버지의 꿈과 업적이 곧 나의 것으로 동일시되고 나의 모든성장이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귀결되어 진짜 자기의 재능과 한계를 보지 못한 엠버의 성장기가 이 영화엔 가득 차 있다. 꼭 장녀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미안함으로, 혹은 인정받고자 하는 집착으로 부모님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자연스럽게 먹어버린 우리의 이야기가 투영되어 엘리멘탈이 유독 한국에서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 몸 같은 두 개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두 개의 개별 존재로, 특히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적인 존재여서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존재인 엠버와 웨이드이다. 하지만 엠버를 화로, 웨이드를 슬픔으로 이해하면 그 둘은 우리 마음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두 개의 감정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의 감정은 그 어떤 것들이든 동시에 올 수 있다. 그중에서도 슬픔과 화는 빈번하게 한 쌍이 되어 우리를 찾아온다.


충분한 화를 내지 못할 때, 내 화가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 같아 누를 때, 우리는 화를 슬픔으로 위장한다. 그러니까 사실은 내 안에 있는 건 화인데 그때마다 이유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장기화되어 심해졌을 때 우리는 그 슬픔에 마저 둔감해진다.이 상태를 우린 '우울'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너무 쉽게 화가 나서 이 화를 표현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을 때 잠시 우리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엔 의외로 찰랑거리는 슬픔이 있다. 내가 잃은 모든 것에 대해선 슬픔이 따라온다. 하지만 나의 이런 슬픔이 여러 이유로 제대로 승인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우리는 그 좌절을 화로 표현하곤 합니다. 특히 누군가와 함께 하지 못하는 슬픔을 슬픔 그 자체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의 취약함을 감춰줄 것처럼 보이는 화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화를 내면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지만 그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정리해 보자면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나는 절대 슬퍼선 안 돼,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주 슬픈 사람은 나는 절대 화 내선 안 된다고 여기곤 한다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엠버와 웨이드가 서로 절대 만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둘은 평화로운 또 창의적인 방식으로 충분히 공존할 수 있고 그럴 때 더 나 다운 내가 된다.





우리의 모든 감정 각자의 역할이 있다. 그중에서 화와 슬픔의 역할을 생각해 보면 화는 앞으로 나아가게, 그리고 슬픔은 머물게 한다.


화를 상징하는 엠버는 끊임없이 질주한다. 배달을 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엠버, 관철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그 앞에서 무한대기하는 것도 불사하는 엠버는 그러나 가만히 머물러서 자신과 타인을 보는데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가게에 오는 손님들에게 유연하게 대하지 못해 걸핏하면 화가 폭발하고야 마는 모습은 잠시 멈춰서야 보이는 상대의 표현 뒤에 숨겨져 있는 마음을 읽는 것이 서툰 엠버의 모습을 보여준다. 엠버는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에도 서툴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가게를 물려받는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슬픔을 상징하는 웨이드는 한곳에 고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어디든 갈 수 있는 '물'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웨이드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경직되고 원리원칙적인 공무원이라는 점부터 고여있는 웨이드를 상징한다. 극 중에서 웨이드의 가장 큰 고민은 '나는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이다. 웨이드는 어렴풋이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아는 듯하다. 공무원으로서 딱지를 발행해야 하는 때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야기를 듣고, 성난 경기장 관중들 사이에서 그들을 달래고 하나로 묶어주는 재능을 보여준다. 하지만 웨이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것이 내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주저앉아서 울 뿐,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둘이 함께 떠나는 장면은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엠버에게 떠남은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머물러 살펴보기 위한 시간인 것 같다. (정규직이 아닌 인턴이라는 것의 상징이 이것일테지) 웨이드에게 떠남은 따뜻하고 안온한 세계에서 한 발자국을 옮기기 위해 시동을 거는 시간인 듯하다.(엠버와 달리 웨이드가 왜 배를 타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우리에겐 머무름도 나아감도 모두 필요하다.

중요한 건 타이밍.

그리고 그 타이밍이 언제인지 알려주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감정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엘리멘탈은 내 안에 도무지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개의 감정이 화해하고 내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는 일종의 '감정 항해기'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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