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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방 Nov 08. 2022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서, 그리하여 모든 것이 중요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결핍이 분노로 바뀌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영화에서 가장 전면에 등장하는 관계는 엄마와 딸이다. 현실의 딸뿐 아니라 모든 차원의 딸은 또한 모든 차원의 엄마를 쫓아다닌다. 온 차원을 헤집고 다니느라 멀티버스의 코스모스마저 파괴해버린, 절대 악이 되어 버린 딸은 사실 단 하나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을 느낄 엄마.


이 엄마가 갖고 싶어 딸은 그렇게 온 차원을 혼돈의 카오스로 만들고 다닌다. 결핍이 어떻게 분노로 변하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우리가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자주 보는, 쟤는 애가 악마 같아 쯧쯧쯧 혀를 차지만 사실은 부모의 사랑이 너무 고파 뭐라도 하게 되는 그런 아이 같은 모습 말이다. 그녀가 자신에 대한 모든 기대와 억압, 그로 인해 견뎌야 했던 슬픔과 분노를 모두 다 때려 넣은 베이글 앞에서 말로는 들어간다, 들어간다 하지만 어쩐지 발걸음은 경쾌하지 않다. 계속 엄마의 눈치를 보며 엄마가 반격할 기회를 주고 또 준다.


난 엄마가 싫어. 필요 없어. 나 혼자도 괜찮아.


그렇게 강하게 소리칠수록 그녀는 더더 크게 외친다.


엄마. 날 잡아줘. 사실은, 날 잡아줬으면 해.


온 차원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 같지만 단 하나 갖지 못한 엄마의 이해가 필요해.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딸의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그게 그냥 우리인 것 같아 외면하기도 싶기도 하다.




현실의 사랑을 해 줄게. I just wanna be here with you.


사실 자신이 보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자신이 느끼는 대로 그대로 느끼는 엄마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엄마이다. 그리고 우리를 아프게 하는 엄마는 언제나 현실의 엄마가 아닌, 환상 속의 엄마다. 내가 무엇이든, 무엇을 보이든 날 사랑해 줄 존재는 우리가 영원히 찾아헤매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랑을 깨고 나올 때 우리는 현실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딸과 엄마는 화해한다. 엄마는 말한다.


난 네 타투가 싫어. 넌 살을 좀 빼야 돼.

네가 대학을 중퇴한 것도 싫어.

그렇지만, 난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나는 네가 사는 방식으로 살 수 없고 네가 보는 방식대로 삶을 볼 수 없어. 아마 영원히 그럴 거야. 하지만 그런 건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 있는데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서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우리가 합일된 존재가 아니어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그 환상을 밟고 딸에게 성큼 건너와 버린 현실의 엄마는 비로소 딸과 연결되게 된다.


딸과 엄마는 여러 차원에서 여러 모습으로 만난다. 그중에서 두 사람이 돌로 만나는 장면이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 같다.



두 사람에겐 여러 차원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받던 딸이 사실은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저 돌, 이었단 생각을 한다. 돌이 된 엄마와 딸은 비로소 세상의 어떤 기대도 요구도 받지 않고 (돌에게 무엇을 기대하진 않으니까) 고요한 곳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둘만의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돌이 되어서야 엄마를 독점할 수 있는 딸은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게 되고 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 엄마는 딸을 향해 굴러가는(!) 용기를 낼 수 있다.


어찌 보면 무생물이 되어서라도, 즉 생명을 잃어서라도 딸이 원하는 건 단 하나. 그저 엄마가 내 옆에 있었으면 하는 것뿐이고 그래서 현실의 엄마가 I love you가 아닌 I just want to be here with you,라고 하며 딸을 안아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게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 검증하는 것에 무의미한 힘을 쏟지 않을래.

그냥 그 시간에, 바로 여기, 이 차원에 너랑 같이 있을래. 엄마의 용감한 진심이 이들을 묶는다.




lovable의 세계에서 lovely의 세계로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차원들이 흥미롭지만 나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 왜 그리 그 소시지 손가락 차원이 기억에 남았는지 모른다.




가장 우스꽝스럽고 괴랄하기까지한 이 차원에서 엄마는, 사랑을 한다. 그것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멸시하는 세무서 직원과 말이다. 대부분의 차원에서 엄마는 죽이고 파괴하고 혹은 홀로 빛나는 스타이다. 하지만 이 차원의 엄마는 가장 인간답고  또 낭만적인 존재가 된다. 그것도 깐깐한 세무서 직원과!!


이 차원에서 나오는 온갖 로맨틱한 장면들, 눈물을 닦아준다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들은 모두 발가락으로 이루어진다. 손가락으로는 상대방의 눈물도 닦아줄 수 없고 상대를 위해 드뷔시를 연주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사랑할 수 없지 않다. 손가락이 없으면 발가락을 쓴다(!)


사랑하지 못할 조건은 전혀 없는 차원에서 엄마는 여성인 세무서 직원과 사랑을 한다. 영화 <캐롤>이 떠오르기도 하는 이 차원은 아마 엄마가 딸의 동성애를 이해한다는 메타포로 쓰이기도 했을 테지만, 나는 엄마가 이민자로서 백인 기득권에게 갖는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멸시를 동시에 가진 복잡한 마음을 상징하는구나 싶었다.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정신의 형태는 분열이다. 분열의 세계에서 인간은 진정으로 성숙할 수 없고 그래서 사랑할 수도 없다. 사랑할 수 없는 조건이 하나도 없는 그 차원에서 온 몸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받은 엄마는 비로소 조건 없이 딸과 함께 있기를 선택할 수 있다. 남편의 말도 안 되는 생존 전략을 받아들일 수 있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서, 그래서 지금의 것을 선택해도 아무 문제 없음을 온 차원을 통과하여 알게 된 엄마는 비로소 현실을 현실처럼 살게 된다. (첫 장면에 가장 '현실적인' 메타포인 영수증을 보지만 어딘가 얼이 빠져있는 엄마가 나온다. 마지막 장면은 다시 영수증을 보지만 안정되고 현실을 현실처럼 사는 엄마가 나온다.)


세무서 직원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세무서 직원은 자신도 이혼을 요구받았는데 자신처럼 'lovable'하지 않은 여자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자조적인 농담을 한다.



왜 lovely가 아닌 lovable 인가, 계속 생각했다. lovable은 수동의 세계이다. 엄마도 그리고 세무서 직원도 사랑을 기다려야 하기에 현실을 살 수 없는 인물이다. 자신 스스로는 사랑스러울 수 없기에 무언가를 통해 계속 증명하려 한다. 엄마는 부모를 버리고 떠나온 자신을 증명하려 이를 악물고 세탁소를 운영하고, 세무서 직원 또한 이달의 직원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아마 딸은,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으로 자신이 그럼에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받고자 한 것 같다.


하지만 수동의 세계에 살 때 우리는 온전히 우리가 될 수 없고 사랑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나는 사랑받을 만해, 가 아닌 나는 사랑스러워, 당연히 그래,의 세계가 우리가 어떤 차원에 있더라도 괜찮은 존재가 되게 한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그리하여 모든 것이 중요한.



영화에서 다른 차원의 나는 사실 완전히 생뚱맞은 내가 아니다. 예를 들어, 뛰지 말고 얌전히 굴라는 아빠의 말을 듣고 얌전히 구는 나는 현재의 나이지만 그 말을 듣지 않고 뛰다가 사고를 당한 나는  두 눈을 잃은 유명 가수가 되는 식이다.


우리는 많은 순간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생각한다. 그 생각이 깊어지면 후회와 자책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말한다. 모든 차원에서 더 좋은 혹은 더 나쁜 차원은 없어. 그래서 인생의 어떤 선택 중에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의 것을 선택해도 괜찮아. 선택 자체보다 중요한 건, 그걸 어떻게 사느냐야. 그래야 현실을 현실답게 살 수 있으니까.


선택한 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도 그 모든 것이 다 너야.

그러니, 뒤돌아 보지 마.

그리고 현재를 사랑해.


영화는 그 복잡하고 현란하고 괴상하기까지 한 모든 이야기들을 통틀어 우리에게 힘주어 말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오후 네시. 흐린 날이었는데 매일 가던 영화관 앞이 왜 갑자기 조금은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것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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