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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Dec 02. 2023

같지만 다른 슬픔

피카소 <광대들 (어머니와 아들>

  입체주의 화가로 알려진 피카소의 청년시절의 작품에는 작가의 실존적 서사가 들어 있다. 피카소에게는 외로움과 우울함이 가득한 짙은 블루톤의 청색시대(1901-1904년)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면서 주황빛이 비치던 장미및 시대(1905-1906)가 있었다. 청색 시대에는 20대 초반에 프랑스에서 파리로 이주한 이방인으로써의 외로움,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들이 없었을 때의 불안함, 그리고 친한 친구의 죽음 등으로 피카소의 작품에서는 검정을 먹은 푸른빛을 띠었다.


피카소 <다림질 하는 여인> 1904,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다림질 하는 여인>에서의 인물의 얼굴은 절망으로 그늘져 있으며 그녀의 몸은 불균형적으로 뒤틀려 있어 혼란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당시는 노동자에 대해 찬미하는 시선의 그림들이 주류였던 반면에 피카소는 노동자에게 자신의 불안하고 우울한 내면을 투사한 것이다. 그러나 피카소는 연인 페르낭드를 만나면서 점차 붉은색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청색이 사라져 갔다. 청색시대의 슬픔이 슬픔 그 자체였다면 장밋빛 시대의 그림에서는 슬픔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묻어 나오기 시작한것이다.



피카소 <광대들(어머니와 아들)>, 1905년, 캔버스에 구아슈, 90X71cm, 독일 슈투트가르트 시립미술관


피카소는 장밋빛 시대에 광대들을 주로 그렸다. 이때 그린 <광대들(아머니와 아들)>에서는 막 서커스 공연을 마치고 내려온 것처럼 어머니와 아들은 아직 공연복을 입은 채로 있다. 그들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고혹적인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보면 가난하지만 허름하지 않은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사람들은 이 작품에 대해서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에 슬픔이 무의미해 보인다거나, 음식이 보잘것없다 한들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고 말한다. 마치 가난도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 모자의 모습은 아름답게 느껴져 이들의 궁핍과 고통에 마음이 집중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의 비애가 이들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피카소의 이 시절에 그렸던 작품 중 미술 시장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이에 대해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독에 대해 생각하길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럴 때 부자들은 자기만 고독하다는 생각을 덜 하기 때문이다."라고 비평했다.


이 그림을 볼 때면 고독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우린 누구나 고독하기에 위로를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부자들에게만 가하는 일침은 아니다. 우린 이 그림에서 고독을 보며, 고독이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위로를 받는다.


SNS 사진 속에는 행복하게 웃는 얼굴들이 넘쳐나지만 그런 이미지들을 볼 때 우리 마음이 즐거워지기는커녕 공허하고 외로워진다. 나는 저렇게 행복하지 못하다는 처량함, 세상의 기쁨에서 소외되었다는 외로움도 느끼게 된다.


피카소의 이 그림을 통해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나도 너도 모두 힘들구나 하는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그 고통의 청색시대의 고통처럼 그 고통 자체인 것은 불편한다. 고독하지만 그것이 고독하게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고독 속에서도 기쁨, 희망, 삶의 의지가 있기를 바란다. 슬프지만 기쁨이 같이 있기에 그 슬픔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림 속 주인공을 보며 고독에 대해 위로받는다는 것은 주인공들에게 미안한 일 아닐까? 마치 아픈 환자의 창백한 얼굴에서 비치는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의 불행을 통해 위로받는다는 것은 그 불행을 가진 이를 더 슬프게 하는 일이다.






그림 속 주인공들을 바라보자. 내 삶의 문제는 잊은 채 그림 속 인물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녀는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있으며 아들의 표정도 공허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있지만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각자의 외로움에 빠져 있다. 그녀는 무엇을 고민하는 것일까? 내일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마음일까? 편안하게 누울 수 없는 불편한 잠자리를 걱정하는 것일까? 하루하루를 버텨내도 끝나지 않는 이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저 여인은 젊고 아름답다. 그러나 가난하다. 그리고 갈 곳이 없다. 아이를 더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떠돌이 광대로 살아가는 것이 지금 그녀의 삶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이 초라하거나 비루하지 않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식사라고는 질기고 딱딱한 바케트 빵 뿐인데도 처량하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피카소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피카소는 이들에게 장미빛 색채와 부드러운 주름의 옷을 입혀주었다. 피카소는 생계를 위해 묘기를 연습하며 노력하는 당찬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아들을 사랑하는 모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운 것은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운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근심 속에서도 삶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카소는 런 그녀의 몸을 장미빛으로 감싼다.  


막 사랑을 시작한 피카소의 눈에는 시련 속에서도 꽃이 피어날 가능이 보였던 것 같다. 메마르고 음습한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새싹이 피어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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