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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Dec 25. 2023

함께여서 갈 수 있었어

안톤 루돌프 모베 <눈보라>


안톤 루돌프 모베 <눈보라> 


네덜란드의 화가 안톤 루돌프 모베(1838-1888)의 그림에는 눈이 많이 쌓였다. 세상은 흰색, 검정, 갈색뿐이다. 단순해 보이는 색이지만 가볍지가 않다. 적은 색으로 차가운 추위, 따가운 바람, 푹푹 꺼져 내리는 폭신한 눈, 그리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왼쪽 나무가 꼿꼿이 서 있어서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오른쪽 길에 난 나뭇가지들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빨려 들어갈 듯 흔들린다. 이 그림의 제목은 <눈보라>다. 눈 내린 풍경은 눈보라가 부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곳에 걸어가는 사람을 빼고 본다면 이곳은 분명 스산하고 깊은 눈 내린 산속이다. 길을 찾을 수 없는 혼돈이기도 하고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일수도 있다. 


그 사이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서두름이 없고 당황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조차 어른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이들의 뒷모습에는 망설임이나 위축됨이 없다. 그저 가야 할 길을 안다는 듯, 지금 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듯 걷고 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정서와는 달리 이 그림을 보며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눈보라 속을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의 깊은 색에 안심이 된다.


눈보라가 부는 날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눈이 이렇듯 많이 오는 날에 외출이라면 필경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깊은 산길인데 아이들은 겁을 먹을 법도 한데 어른들을 따라나섰다. 큰 눈이 온 숲길에서도 이들이 안심하고 길을 걸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정표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길은 눈에 덮여 보이지 않지만 나무가 길의 흔적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걸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걷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꽤 혹독한 눈보라와 함께 한 해가 시작되었다.  눈이 어찌나 매서운지 그 눈에 묻혀버릴 것 같았다. 다니던 길에는 눈이 덮여 방향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을 때쯤 바람 한 점이 다가와 나를 깨워주었다. 나무가 흔들리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라고 알려 주었다. 그 방향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 옆에서 함께 걸었다.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이 길을 함께 걷고 있다. 긴 겨울의 서러움 속을 함께 걷고 있다. 


앞서 걸은 당신이 있어, 함께 걷고 있는 당신이 있어,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어 기쁜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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