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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an 25. 2024

슬픔이 다시 찾아오거든

1.

첫 번째 방문.

너는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는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놨지.

나는 넋이 나가버려 너의 횡포를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

그만 눈을 감아버렸어.

이건 꿈일지도 몰라.          


두 번째 방문

너는 내 몸을 덩굴처럼 감아 압박했고 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몸에도 상처가 났어.

난 너에게서 얼마 멀어지지 못했어.

도망갈수록 계속 조여 오는 덫 같았지.

          

세 번째 방문.

너는 결국 나를 통째 삼 겨 버렸어

아니 내가 삼켜 버린 걸 지도 몰라.

너와 가까이할수록 알게 되었어.

너는 나를 협박하지도 해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이야.

깜깜한 암흑이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편안했어

 

네 번째 방문.

너는 갑자기 돌변했어. 잘못한 기억만을 골라 난도질을 하고 다녔지

피가 난 상처가 허옇게 벌어졌지만 넌 계속 야멸차게 나를 꾸짖기만 했어.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지


다섯 번째 방문.

칼에 베인 자리에 웅덩이가 생겼어.

그곳에서 물이 퐁퐁 솟아올랐지.

물에는 하늘 그림자가 들어있어.

내가 그리워하는 것들로 그득히


너는 사랑했던 것들의 흔적이었는지도 몰라.

너는 기쁨의 다른 얼굴이었는지도 몰라.



2.

너는 나를 다시 찾겠지.

다음번에는 너를 모른 척하지 않을게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게


불길 같은 분노

숨 막히는 불안

가슴아린 자책감

연약한 외로움

차가워진 미움


너와 함께 찾아온 감정들이 고요해질 때까지

다시 사랑이 퐁퐁 솟아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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