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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n 16. 2024

안쓰럽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권여선 <사랑을 믿다>

그리움이 들었다.


책을 읽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사는 게 너무 벅찼다. 어떻게든 계약직 자리라도 구해서 일하고 싶었다. 계약직이 된 후에는 정규직이 되고 싶었다. 정규직으로 일한 후에는 연봉을 많이 받고 싶었고 기왕이면 이름 있는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목표하던 길을 가고 있었다. 남들이 알만한 회사에 다녔다. 나는 프로젝트 피엠이 되기도 했고 구매부서, 인사관리 부서 팀장이기도 했다. 소위 SKY출신 부장들도 사근거렸고, 중소기업 회사 대표들도 명함을 들고 잘 보이려고 했다. 저마다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얻어야 했을 테니까. 연봉이나 학벌에 크게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 한쪽이 빈 것 같은 기분은 줄어들지 않았다. 바쁘지 않은 날에도 모니터 화면에 화살표로 빈 마우스질을 하며 의미 없는 선을 그었다.


그렇게 흘러가던 날이었다. 회의차 지방에서 올라온 한 직원의 핸드백에서 책 한 권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이었다. 너무 낯선 제목이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이 싫지 않았다. 물이 젖은 종이에 물감이 번지는 것 같았다. 문학..문학...


언제 어떻게 책을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직원의 가방에서 발견한 그 책을 지하철 역에서 읽고 있는 장면으로 기억이 이어진다. 플랫폼 천장에 달린 전등에 나방이 사방에서 모여든 시간이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린 후에도 책을 읽느라 집으로 가지 못했다. 나를 플랫폼 의자에 앉힌 것은 <2008 이상문학상>에 실린 첫 작품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였다. 어떤 내용이 나를 붙잡은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의 공기와 풍경 그리고 마음만은 생생하다. 이처럼 기쁜 몰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 몸에 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얼마 전 딸아이가 자기 방의 가구 배치를 바꾸겠다며 책장 하나를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 참에 집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던 중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사랑은 믿다>였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있었다. 15년 전 그날처럼 마음에 물감 번지는 것 같았다. 다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알았다. 그 시절 무엇을 그리워했던 것인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소설 속 남자는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다. 그것은 세상 전부를 잃은 것 같은 고통이다. 그 와중에 옛날에 잠시 썸을 타던 여자를 만난다. 음식을 맛깔나게 하는 정감 있는 술집에서 만난 여자는 자신이 실연에 대해 잘 아는 양 이야기한다. 자신이 잘 모르던 여자의 모습에 남자는 의아하면서도 흥미롭다.


여자가 실연의 상처로 여자가 상처로 괴로워할 무렵 그녀의 어머니는 친척집에 심부름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친척집에 간 그녀는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우연한 사건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과 연대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를테면 실연의 연대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고통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랑의 크기만큼 고통의 크기도 줄어든다. 여자는 그렇게 세상의 어둠을 알게 되고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는다.  


남자는 여자의 실연의 상처와 극복 과정보다도 속이 쓰린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녀의 사랑의 대상은 바로 주인공 남자였던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자체로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남자를 괴롭히는 이야기는 바로 여자가 받은 유산이었다. 여자가 우연히 방문한 친척집으로부터 건물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남자는 자신의 재산이 될지도 모를 그 건물을 놓친 것에 고통을 느낀다.


남자는 그녀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고 그와 동시에 건물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혼자 술집에 와서 그녀와의 일을 아쉬워한다. 그리고 오지 않을 그녀를 기다리며 혼자 술을 드링킹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남자는 실연의 고통을 덜어낸다. 이런 하찮음, 이런 보잘것없는 사랑을 조소한다. 그러기에 느끼는 상실의 고통 또한 줄어든다. 그럴만한 사랑에 어울리는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사랑을 믿었던 이 변변치 못한 남자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냉수를 찾는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P.41)


15년 전 베였던 마음이 이제야 아린다. 아픈지도 몰랐던 통증을 이제야 느낀다. 이 문장의 뜻을 지금에야 알았다.  나는 사랑을 믿었다. 그리고 더는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다시 그리워했던 것이다.





사랑을 믿었다. 안쓰럽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다.


나도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한 남자를 만났다. 나는 남자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어디서 무얼 배웠고, 돈을 얼마나 있는지, 집안은 어떠한지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남자는 몸은 다부져 보였다. 쉽게 나대지도 가볍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입술은 얄했지만 핏기붉었다. 내뱉는 말들은 가볍지 않게 입안을 맴돌다 흘러나왔다. 몇 년 묵은 묵은지 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시간을 끊인 곰탕은 아니더라도, 하룻밤을 재워놓은 다대기 양념처럼 풋내가 없었다. 남자는 내 눈을 오래 쳐다보지 못했다. 말을 하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속삭이듯 눈빛을 피했다. 햇빛이 따가운 것처럼 그늘이 익숙한 것처럼 서늘한 바람 속에 머물고 싶은 것처럼 붙들려 하면 어딘가로 숨는 그런 사람이었다.


몇 달 만나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대뜸 같이 살자고 했다. 반지하에서라도 살자고 했다. 나는 웃었다. 무작정 같이 살자고 하는 이 순진한 남자가 귀여웠다. 나도 사랑만 있으면 무엇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사랑이 속물이 아니길 바랐다. 난 가난한 사랑을 알지 못한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구경이나 했을까. 내 뒷배를 봐주는 부모님이 계셨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일이 없었다. 아주 큰 사고가 아니라면, 혹시 큰 사고가 나더라도 돈 때문에 위축될 거라는 상상은 한 적이 없다. 주변에 경제사정이 어려웠던 친구들이 었었지만 그들의 고충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어도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하는 순진한 아가씨였다.


반지하라도 좋다는 마음은 현실 앞에 무너졌다. 벌어놓은 돈만 가지고는 정말 지하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결혼을 하면서 빛을 져야 한다는 것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나는 제법 씀씀이가 있어도 저축도 착실히 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서 빚쟁이가 되고말았다. 전세자금으로 오천만원을 대출받았다. 가진 것보다 더 많은 부채가 생기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우린 사랑이 있으니까. 사랑이 있다고 믿으며 비천한 생각을 꾹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사랑이라 믿으며 숨겨두었던 마음이 진짜 비천한 일들을 만들어 냈다.


나는 정직하지 못했다. 사랑을 믿기에는 너무 속물이었다. 겉으로는 결혼을 하면서 학벌, 집안, 돈을 따지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질에 큰 비중을 두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풍족하지 못한 삶에 대한 불안에 압도되었다. 괜찮은 척 다 안아주는 척했지만 실은  오천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내 결혼은  오천과 함께 동거에 들어갔다.  오천은 불안, 분노, 절망이라는 자식을 낳았다. 집이 터져 버릴 정도록 가득했다. 우린 더 큰 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좀 더 넓은 집에서 살면 그래도 숨 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하나 샀다. 은 더 많아졌다. 그리고 넓은 집에 더 많은 슬픔이 채워졌다.


처음에는 내 슬픔이 미웠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선량한 어린 여자였다. 순진하게 사랑을 믿었던 여자였다. 하지만 이제 안다. 사랑을 배신했던 것은 바로 나다. 우리 사이에는 항상 돈, 불안, 실망, 절망 등의 감정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 채우지 못한 나머지 공에는 슬픔이 채워졌다. 슬픔을 뺀 나머지가 사랑의 크기였음을 이제는 안다.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만큼의 크기인것이다.





찬물을 마셔야 할 시간이다. '시린 진리의 찬물'을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났으며,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서른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지만 이미 저묾과 어둠을 예비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P. 40)


여자와 함께 갔던 술집에 남자는 홀로 찾아가 오지 않을 그녀를 기다린다. 지난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기다린다. 남자는 안다. 사랑을 믿었던 시간이 청춘과 함께 흘러가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어둠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소설은 실연당해 슬픈 이 남자를 돈에 미련을 가지는 한심한 캐릭터로 설정하고 그리고 이제 '밝은 날은 내게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라며 넘어진 남자를 한번 더 밟는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이 희망을 찾게 하는 방법이다. 권여선 작가는 주인공 그녀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찾게 한다.


"그래야 거기 희망이 있다는 걸 알지. 뭔가 잔뜩 어질러놓아야 거기 공간이 있다는 걸 알듯이."(P. 20)


여자는 실연한 자를 안고 위로를 해주지 않는다. 여자는 희망을 훼방 놓는 방식으로 희망을 느끼게 한다. 희망 훼방받을수록 더 희망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방해받는 것은 더 쫒으려 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렇게 실연의 고통에 놓인 자들에게 희망을 단절시킴으로써 희망을 찾게 하는 것이다.


밝은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내 생애 조도가 여기가 최대치라면 이제는 점차 어둠으로 가게 될 것이다. 권여선의 이 문장은 앞으로의 조도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오지 않게 되겠지만 남은 빛 어떻게 저물어 갈지는 아직 미래의 시간에 남겨져 있다. 여전히 공간은 남아 있다. 저무는 시간 만틈의 절박함도 함께 있다.


15년 전 하지 못했던 물음을 던져본다.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결국 사랑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아니, 내가 할 만한 질문 아니다. "티컵 강아지가 드래곤을 대적하겠다고 날뛰는 것만큼 안쓰럽고 우스꽝스러운 경우(P.13)"가 바로 이 질문이다.


내가 믿었던 사랑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다. 위로받고 싶고, 안전하고 싶고, 불안하지 않고 싶은 사랑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받고 있는 위로가 기대보다 보잘것없다면, 내가 했던 사랑이 보잘것없었던 것이다. 것이 공평하다. 그러니 원망도, 미움도 과장되었다. 삶의 진실은 이토록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나의 가장 보잘것없는 부분을 찔러댄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진다. 나도 어서 찬물 한 바가지 들이켜야겠다. 이 보잘것없음이 나를 바꿀 수 있다면 시리더라도 그것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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