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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너머

백척간두진일보

by 정희주

백척간두진일보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가장 고민되는 상황에서, 되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한계 앞에서 쓰인다. 백척간두는 30미터 정도 높이의 장대를 말한다. 그 장대위에 올라서는 것도 어렵지만 거기서 한 걸음을 걷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이미 높은 장대 위에 있어 위험천만한데 거기서 한걸음은 더 내딛는 것은 추락을 각오해야 한다. 그럼에도 진일보하라고 한다. 왜 그래야 할까?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는 말 뒤에는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 現全身)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백 척 높이에서 한걸음을 내딛으면, 세계가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한계를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단일까? 용기일까? 실행일까? 올해 초에 무언가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가장 가장자리까지 간 것 같은데 그 다음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한걸음이 어디인지, 어떻게 디뎌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제자리를 맴맴 거렸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고, 힘들었던 문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삶이 기쁨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새로운 삶을 열기 위해서는 무언가 자극적인 것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백척간두에서 떨어지는 일이 화끈한 결기를 지닌 사건이라고 생각해 왔다. 퇴사, 이혼, 이사, 유학 같은 삶의 장소를 옮기거나 삶의 형식을 바꾸는 큰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깜냥에 화끈한 사건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조금씩 움직였다.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을 벌였고 그 일들을 책임지며 수습해 나갔다. 그렇게 한 해를 보냈다.




올 한 해 세웠던 몇 가지 계획이 있다. 우선은 돈이 벌고 싶어졌다. 벌이가 좀 더 되는 직장으로 이직을 했다. 그 과정에서 미해결 된 심리적 갈등을 만나게 되었다. 경쟁적인 직장관계 속에서 질투, 시기심 등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이슈들을 만났다. 타인의 평판을 의식하고 내 능력을 의심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은 일들도 생겨났다.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이 각질이 일어나듯이 온몸에 허옇게 번져버렸다. 이참에 물에 불려 제대로 때를 밀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번은 정리하고 갈 일이었다. 때를 밀었다. 물에 불려 빡빡 밀었다.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지도 모르게 문질렀다. 살갗에서 빨간 피가 배어 나올 때쯤 되어서야 멈출 수 있었다. 이제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각질은 계속 생기는 것이었다. 한 번에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씻고 닦고 돌보며 관리해야 하는 일이었다. 매일같이 정갈하게 살아야 하는 일이었다.


미술관 도슨트를 몇 년 만에 다시 하게 되었다.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서 그만두게 되었지만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했던 좋은 기억이 자주 생각이 났다. 미술관에서만 주는, 전시 해설을 할 때만 느끼는 좋은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을 다시 경험하고 싶었다. 새롭게 전시 해설을 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기분을 느꼈다. 처음 전시 해설을 시작할 때는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것이 좋았다. 나의 미술 이야기에 관심 가져주고 경청해 주는 것이 좋았다. 나를 매개로 관람객들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화하는 것이 좋았다. 내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다시 도슨트를 하면서는 이전과는 또 달랐다. 미술작품과 나와 관람객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결감을 느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마음과 마음을 연결해 준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뜻하고 다정하고 진지했다. 나는 설명을 하며 관람객의 표정을 살피는 편이다. 이해하고 있는지 어려워하는지 살핀다. 작품을 알고자 하는지 멀어지고자 하는지 혹은 망설이고 있는지 살핀다. 때론 가깝게 끌어 오려고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편함을 같이 견디려고 한다. 설명할 것은 설명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마음에 담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미술과 사람을 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회피하기보다는 감당하는 쪽으로 변해하고 있다. 다양한 경험이 한켜 한켜 쌓이면서 나의 테두리가 조금씩 거쳐가는 것을 느꼈다.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확장되고 있었다.


글을 꾸준히 쓰려고 노력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글쓰기로 시작한다. 별거 아니더라도 메모라도 끄적이거나 어제 쓴 글을 퇴고한다. 가끔은 글이 쓰고 싶어서 잠을 설치는 날도 있다. 글은 내 삶이 되어 가고 있다. 처음 글을 쓸 때는 괴로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라도 쓰고 나면 조금 살 수 있었다. 살기 위해 글을 쓴 거다. 그렇게 쓰인 글들이 꽤 모였다.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썼던 글 중에 이제는 제법 주제별로 묶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모여진 글들은 또 다른 내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자아가 만들어질 것이다. 살기 위해 했던 일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고 그 일상은 나를 다시 살리고 있다. 새로운 나를 생성시키고 있다.


매주 철학을 공부했다. 공부하며 들었던 의문을 간과하지 않았다. 철학자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그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것은 나의 삶의 어느 조각과 닮아 있을까? 내 경험이 아닐지라도 누군가의 어떤 경험과 닮아 있을까? 경험에서 찾을 수 없는 글들은 꼭꼭 씹어 삼켰다. 때가 되면 내가 먹은 것이 살아나 의미를 알려줄 것이라 믿었다. 나를 가장 흔들어 놓았던 문장이 나를 더 아름답게 하라리 믿었다. 그 믿음은 후기를 쓰게 했다. 후기 쓰기는 철학자의 말에 대한 응답이자 감사편지였다. 진실한 말을 들었으니 진실하게 응답해야 했다. 무엇 때문에 기뻤고 무엇 때문에 힘들었으며 그 과정이 나의 몸을 변화시켰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예의를 갖춘 편지를 쓰고 싶었다. 그런 편지를 쓰는 동안 몸에 피가 돌았다. 살에 윤기가 생겼다. 삶의 생동을 느꼈다.


무언가 꼬물꼬물 헤쳐나가는 동안 의존이 조금씩 줄었다. 적어도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찾지 않게 되었다. 친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정도의 체력과 마음상태가 될 때만 길을 나섰다. 말을 조심하게 되었다. 내 말이 지닌 힘을 알게 되었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많은 오해의 중심에는 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네가 오해한 게 아니라 내가 오해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 늘어났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기적 같은 순간이 만들어 졌다. 하루에도 기적이 여러 번 일어났다. 그리운 것도 많아졌다. 그리움은 나를 서글프게 했다. 하지만 점점 그런 그리움도 익숙해져 갔다. 그리움이 있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움은 나를 그림 그리게 하고 글 쓰게 한다. 그리운 이를 위해 노동하게 한다. 그리움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백척간두진일보는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백척간두라는 높이에 겁먹어 오해하고 말았다.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이 아니라 진일보하라고 했다. 한걸음이다. 나아가는 것은 한 번의 결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걸음'의 반복이다. 큰 사건이 변화의 이정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사건 자체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백척간두진일보가 시나브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걸음 뗄 때마다 그만큼의 세계가 보인다. 작은 찰나가 반복되고 그 찰나만큼의 세계가 펼쳐진다. 한걸음을 뗄 때마다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고통 너머의 세계, 슬픔 너머의 세계, 피해의식 너머의 세계, 단절 너머의 세계가 펼쳐진다. 다시 흐르는 세계, 진동하는 세계, 기쁨이 울리는 세계, 깨달음이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가장자리에 선다. 가장자리 너머의 가장자리다. 그 끝에서 묻는다. 훈육된 사랑 너머로 갈 수 있을까? 풍문으로 들은 그런 이야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가족이 아닌 이와의 사랑, 혈연이 아닌 이들과의 사랑, 소유하지 않은 사랑, 맹세하지 않는 사랑, 세속의 언어로 명명되지 않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랑은 나를 더 완전하게 할까? 그런 사랑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나는 다시 가장자리에 서 있다. 그런 사랑의 출발선에 서 있다. 더 알고 싶고 알 수밖에 없는 그 시작에 서 있다. 간에 흩어질것을 알면서도 노래하고 싶다. 변할 줄 알면서도 사랑하고 싶다. 꿈인 줄 알면서 꿈꾸고 싶다. 그것이 살아있는 세계임을 보고 말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오직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 살다 사랑을 남기고 간 사람의 날이다. 난 기독교인은 아니다. 종교로써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믿는다. 그의 사랑을 믿는다. 인간이 가진 고귀한 마음을 믿는다. 내가 종교를 믿는다면 그것이 사랑이면 좋겠다. 믿음을 잃어버린 시간을 지나 믿음을 쫓아가고 있다. 백척간두에서 떨어지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새롭게 생성되는 삶의 기쁨을 누리며 한계 너머로 가고 싶다. 알고자 하는 것은 알게 될 것이고 찾고자 하는 것은 찾게 될 것이다.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는 기어이 내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래를 향해 오늘도 한걸음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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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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