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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나가는 길은 어느 쪽인가요?

<가르침과 배움의 현상학> 후기 : 나만의 화두 풀이

by 정희주

미혹한 스님이 질문을 한다

"산을 나가는 길은 어느 쪽인가요?"


깨달은 스님이 대답한다.

"물 따라가시오"


<가르침과 배움이 현상학> 수업에서 나온 이 화두가 가슴을 훅 찔렀다. 내 삶이 문제를 해결해 줄 화두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나는 미혹한 스님처럼 산을 나가고 싶다. 산은 넘어가야 할 과제가 있는 공간이다. 나는 그 문제에서 나갈 길을 찾고 있다.


깨달음 스님의 대답은 간결하다. '물'을 따라가라고 한다. 물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른다. 산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은 물을 따라가는 것이다.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이 순리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산에서 물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언뜻 물은 위에서 아래로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다. 하지만 급류를 만난 경험이 있다면 안다. 강물은 굽이치며 내려간다는 것을 말이다. 깊은 계곡에 물이 많아질수록 물살의 흐름은 거세다. 생명을 위협할 만큼의 공포스러운 순간도 찾아온다. 순리를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편안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현상학> 에는 이 화두와 함께 선승들에게 잘 알려진 노래 하나가 소개되어 있다.

마음은 만경을 따라 굽이치는데
굽이치는 그곳에 실로 그득함이 있구나.
흐름에 따라 본성을 깨달으니
즐거움도 없고 근심 또한 없어라


"물 따라가시오"라는 말에는 기쁠 때는 기뻐하고 근심할 때는 근심하는 것이라고 한다. 굽이치는 강물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멈추었다. 예전 같으면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기쁨을 기쁨대로 슬픔을 슬픔대로 느끼라는 말이니까. 하지만 기쁨과 슬픔이 동시적으로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쁨과 근심 중 어느 하나를 선택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둘의 낙차가 삶과 죽음만큼의 크기라면은 어떻게 해야 하지? 견뎌야 할까? 우선 빠져나와야 할까?

강요배 <치솟음>



"마음은 만경을 따라 굽이치는데"


내 마음은 지금 만경을 따라 굽이치고 있다. 기쁨과 슬픔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최근에 내게 변화가 생겼다. 겉으로 척하려고 했던 것과 속에 있는 것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지는 몰라도 마음의 갈등이 현저하게 줄었다.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주변의 문제가 좀 더 다룰 수 있는 것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생각이 열리고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영감이 떠오르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마음이 꾸물 거리고 몸을 더 많이 움직이게 되었다.


변화의 기간 동안 만났던 색채 덩어리의 그림들, 미술관 지하에서 듣던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 불교의 가르침, 베르그손의 철학,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 공부했던 케테 콜비츠, 르느와르와 수잔 발라동,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등은 내 몸과 마음을 움직였다. 그 글을 쓰기 위해 나의 기억을 떠올려야만 했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억들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마 그때쯤이다. 그런 기억들이 조금씩 조금씩 쌓이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자다가 무언가에 놀라 깨어났다. 갑자기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마음을 잊은 것이 아니었다. 그 마음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깨어나서도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현실에 있지만 현실이 아니었다. 현실이 아니었지만 현실이었다.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나의 무의식을 헤집어놓는 감정 글쓰기 수업에서였다. 기억과 관련한 글을 쓸 때면 무의식이 내 몸을 밀고 나가는 것 같았다. 내 몸은 정신의 기억을 받아 적는 도구가 되는 것 같았다. 감시병의 시선이 느슨해지면서 나 스스로를 감금했던 감옥에서 탈주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무의식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 같은 그런 희열과 공포가 동시에 들이닥쳤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서 나는 큰 기쁨과 큰 공포 속에 휩싸였다. 나는 그 공포를 다루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상자는 닫혔다. 그 마음이 늘 아쉬웠다. 다시 그 시간이 돌아올 수 있을까? 다시 그때의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 시간을 충분히 겪어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런데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 돌아오는구나. 미해결 된 문제는 다시 나를 찾아오는구나. 간절히 원한 것은 다시 찾아오는구나.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그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기쁜 순간만이 다시 나를 찾아오지는 않는다. 과거에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도 다시 찾아온다. 잘못을 저지른 일은 벌을 받으며 반복되기도 하지만, 문제를 바로잡을 용기가 없어 소심하게 행동했던 일도 다시 나를 찾아온다. 내게 잘못한 이이게 책임을 묻는 것이 두려워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결국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 부메랑은 과거와는 다른 사건의 양상으로 다시 돌아온다. 나는 그 부메랑을 맞이하고 있다. 매듭짓지 못했던 사건이 다시 내게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지금 이 문제를 미온적으로 대한다면 이 문제는 또다시 알 수 없는, 혹은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기쁨도 다시 되돌아오듯이 슬픔도 다시 나를 찾아왔다. 슬픔의 사건 역시 미해결 되었기에 다시 나를 찾아왔다. 슬픈 일이라고 무시하거나 회피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이제라도 나는 이 문제를 맞이해야 한다. 그래, 다시 돌아왔구나. 이제는 제대로 '너'를 맞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강요배 <대지 아래 산>


"굽이치는 그곳에 실로 그득함이 있구나."


근데 이 근심과 기쁨의 낙차가 너무나 커서 괴로움이 생긴다. 기쁨으로 더 크게 치고 나가자니 근심이 나를 끄집어 내린다. 기쁨이 힘이 없는 것인지 근심이 더 힘이 센 것인지 내가 나약한 것인지 근심이 자꾸 나를 끄집어 내리려 한다. 잠시 물밖으로 빠져나가 쉬어야 할까? 아니면 그 물속에서 익숙해질 때까지 견뎌야 할까?

이 두 가지 사건에서 매일 같이 갈등을 한다. 매일같이 굽이치고 매일같이 부딪힌다.


기쁨과 슬픔이 굽이치는 강물.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삶의 희로애락이 크게 요동친 기억이 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1년,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1년이다. 그 1년은 동시에 일어났다. 아이가 태어나던 그 해에 엄마가 쓰려지면서 병원에 누워계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걷지를 못하셨고, 그다음에는 스스로 밥을 먹지도 되셨고, 그다음에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셨다. 아이들은 너무나 이뻤다. 처음에는 분유를 조금씩 먹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옹알이를 시작했다. 엄마는 죽어갔고 아이는 자라났다.


삶과 죽음 사이, 사랑과 이별사이, 즐거움과 근심 사이에서 나는 크게 진동했다. 너무 힘들고 괴롭지만 아이들 웃음을 보며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내 마음에는 슬픔과 기쁨의 스위치가 있는 것 같았다. 특정 상황이 되면 기쁨의 스위치가, 다시 상황이 바뀌면 슬픔의 스위치가 켜졌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었다. 기쁨과 슬픔의 교차, 기쁨과 슬픔의 요동, 굽이치는 강물.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때처럼 강물은 다시 굽이치며 일렁이고 있다. 나는 그때 큰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때의 1년은 내게 큰 파장을 만들었다. 그 뒤로 삶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굽이치는 강물은 내게 말하고 있다. 더 깊은 강물이 되라고, 더 거침없이 흐르라고 그 속에 실로 그득함이 있다고. 기쁨과 슬픔의 큰 낙차를 겪으며 더 큰 강물이 되라고. 그렇게 기쁨과 슬픔을 모두 품게 될 것이라고, 그리하여 더 큰 평온함을 갖게 될 것이라고.


기쁨은 기쁘게 근심은 진지하게 대하며 흐름을 따라가 보련다. 위험할 때는 물 밖으로 피신하고, 물에 빠졌을 때는 바닥을 치고 다시 나오고, 크게 위험하지 않은 요동 속에서는 흔들림을 즐기고, 반짝이는 햇살과 쏟아지는 별빛에 눈부셔하며 그렇게 흘러가 보련다. 부딪치며 흐르는 것이 순리다. 나는 더 큰 강으로 흘러가고 싶다. 실로 그득함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강요배 <고원의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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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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