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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l 04. 2023

애도, 기억하려는 고된 노동

케테 콜비츠 <애도>

   브런치에 아버지에게 보내고 싶은 글을 모아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다. 이 브런치북의 첫 독자는 오빠였다. 이 편지는 오빠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 어쩌면 오빠를 위한 글이라 생각했다. 브런치북 링크를 보낸 날 저녁, 오빠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 글을 읽게 해 줘서 고맙다.


나도 조금 떨렸다. 혹여 가족 이야기를 공개한 것을 보고 부정적으로 생각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다행히 오빠의 반응에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오빠가 말을 이었다.


난 너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난 너처럼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어.


이 말에 마음이 아팠다. 나도 적어놓은 기억들을 늘 간직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갈등하며 지친 어느 날, 너무 속상해서 산에 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던 어느 날 시작된 기억이었다. 그렇게 조각 조기억이 모아지게 되었다. 하나씩 떠올리다 보니 좋았던 기억들이 깊은 땅속 어디에선가 조금씩 길어 올려졌다. 그런 기억들이 하나씩 쌓이면서 슬픔 쪽으로만 기울었던 추의 균형이 잡아졌다. 슬펐던 적도 많지만 기뻤던 적도 그 못지않게 많았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애도는 사랑의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으로 생겨난다. 애도는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슬픔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졌으므로 그 대상에게 향했던 리비도(일종의 에너지)를  철회시켜야 한다고 했다. 자아가 그 철회의 욕구에 대해 심하게 반발하게 되면 현실에 등을 돌리게 되고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에 대한 집중이 그대로 유지된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게 에너지가 집중되므로 현실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과거의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이미 죽은 이가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일상에서 슬픔 생각이 침습적으로 찾아들고, 죽은 대상이 꿈에서 계속 나타나곤 한다.  


나를 떠나간 사랑했던 대상을 아무리 잊고 싶어도, 이젠 잊고겠노라 굳게 마음먹었다고 해서 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잊어야 한다고만 생각해서 감정을 회피하면 나중에 왜곡된 형태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잊기 위해서는 반대로 계속 생각하고 기억해내야 한다. 계속 생각하고 드러냄으로써 더 이상 슬퍼할거리가 사라지게 해야 한다. 슬픔도 원망도 회한도 모두 태워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슬퍼할 일을 모두 소진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기억함을 통해, 지금 현재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게 향한 리비도(에너지)를 떼어내는 일을 애도 과정라고 한다. 애도는 죽은(떠난) 대상에게 집중된 에너지를 떼어내는 일이기에, 죽은(떠난) 대상을 다시 한번 죽이게 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케테 콜비츠 <애도>, 1938, 석고에 채색, 28x25cm,


   미술에서는 애도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특히 독일의 예술가 케테 콜비츠(1867-1945)는 애도를 위한 미술작품 활동에 집중했다. 그녀의  둘째 아들이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2개월 만에 전사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반전과 평화를 주제로한 작품을 주로 만들었으며 예술로써 부당한 권력에 투쟁했다. 그녀는 전쟁의 참상, 특히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작품화했다. 콜비츠는 조각을 만들며 아들의 선선한 모습을 떠올렸으리라. 그리고 그 상실로 인해 고통받았던 순간의 감정을 다시 온몸으로 겪었으리라. 작품을 조각하고 형태가 드러날 때마다 살을 발라내고 심장이 도려지는 고통을 반복했으리라. 그 작업을 반복하며 상실의 슬픔을 조금씩 떠나보냈으리라.


미술에는 이와 같이 애도의 기능이 있다. 미술치료에서도 이미지를 만들어 애도의 작업을 진행한다. 사랑했던 대상을 그림이나 조형으로 만들어 기억을 재생시킨다. 그 대상과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당시의 감정과 지금의 감정을 정리해 본다. 그리고 이제는 부재한 대상이기에 현실에서는 해줄 수 없었던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을 이야기한다. 마치 연극을 하듯 내가 그 상실된 대상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이 과정은 부재한 대상을 계속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대상이 내 눈앞에 재현되기에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애도는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버지를 기억하며 쓴 글도 일종의 애도 의식이었다. 기억을 반복하면서 슬픔을 태워내는 고된 노동이었다.   


   애도는 죽음에서만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이 가장 큰 고통이겠지만 이별은 삶의 많은 순간에 들어 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연인, 마음이 통하던 친구, 성인이 된 자녀의 독립, 졸업, 이직 등 많은 인간관계의 부침들 속에 이별이 있다. 연말에는 한해와 이별하고 작게는 그날 하루와도 이별을 한다. 매 순간이 죽음이고 매 순간이 이별이기에 이 이별의 의식을 잘 치러야 한다. 일상에서도 잘 죽고 잘 슬퍼해야 한다. 잘 애도되지 못한 감정은 멜랑꼴리(우울)가 되어 자책감, 자기 비하의 감정으로 뒤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슬퍼할 것을 잘 슬퍼하자. 슬픔이 올라오면 슬퍼하고, 미움이 깃들면 미워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자. 그 슬픔의 감정을 활활 다 태우고 나면 더 이상 태울 것이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랑을 시작할 공간이 생긴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죽음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물론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고, 코끝이 찡해지는 날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자책이나 회한의 감정은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까지 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모든 기억이 그리움이 되어 부재의 자리를 채우고 있다.


오빠에게도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오빠도 내 글을 읽으며 아버지를 회상하고, 과거를 기억해 내면서 고통의 재료를 타닥타닥 태워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버지의 따스함을 그리움으로나마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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