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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l 14. 2023

인생의 크기

주재환, <최민 형 회갑기념>

주재환, <최민 형 회갑기념>, 2004


   파란색 플라스틱 쓰레기 받이가 정갈하고 투명한 유리관 속에 고이 들어 있었다. 이 작품은 최민 평론가가 자신의 회갑 생일에 주재환 작가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작품명이 <최민 형 회갑기념>이다. 주재환(1941~)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천 원짜리 미술'이라고 부르곤 했다. 위 작품처럼 작품에 사용되는 재료가 재활용품이나 플라스틱 등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상의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상의 재료를 사용하여 일상의 모순을 드러내고 세상의 편견을 풍자한다. 주재환 작가는 일상의 재료를 이용하여 일상의 삶을 작업하는 그야말로 '일상의 예술화'를 실천한다.


위 작품에는 보트를 탄 사람이 홀로 노를 저으며 푸른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벗할 것은 오직 구름 한 점뿐, 부서진 종이 먼지로 가득한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인생이란 이렇듯 망망대해를 혼자 가야 하는 외로운 여정인 것인가?"
"인생이란 이렇듯 먼지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는 여정이란 말이가?"


나는 "인생이란..."을 중얼거리며 잠시 진지충이 되어 볼까 했지만 번뜩 정신을 차려본다.  이 진지한 인생의 이야기가 '쓰레기 받이' 위에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내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일들이 쓰레이 받기 위에 펼쳐지는 사소하고 별 의미 없는 고민들일 수도 있겠다는 허무함.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거창하고 어려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허탈감, 나의 고민은 더 큰 삶이 아니라 고작 쓰레기 받이 만한 스케일일지 모른다는 비루함마저 들게 한다.


허무함, 허탈감, 비루함은 모두 인생을 과장해서 바라봤기에 드는 마음이다. 실제보다 더 거대하게 바라봤기에, 실제보다 더 크게 의미를 부여했기에 드는 마음이다. 인생에 살아갈 목적이 있는 것처럼,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런 생각은 인생을 무겁게 한다. 인생을 심각하게 보게 한다.


   심각함은 머릿속에서 상상할 때 만들어지는 과장된 생각이다. 문제 그 자체의 크기보다 더 부풀려졌을 때 만들어진다. 심각함은 실제 일의 크기 보다 과도한 에너지를 쓰게 된다. 그 과도함은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고, 고민하는 그 자체에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심각하게 인생을 고민하고 있느라,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작 해야 하는 일은 문제를 고민하는 일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가는 일일 텐데 말이다. 인생은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일 텐데 말이다. 하고 싶을 일은 해보고, 갈등을 직면하며 그렇게 부딪쳐 나가는 일일 텐데 말이다.


주재환 작가는 세상의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우리가 의미 부여하고 있는 것이 실제 그만큼의 의미가 아닐 수 있음을 비틀어 표현한다. 그의 이 작품은 인생의 크기를 실제의 크기만큼 보라고 일러준다. 실제 크기만큼을 바라보고 그만큼의 에너지를 삶에서 성실히 사용하라고 알려준다.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유쾌하게 삶을 살라고 말해준다.


주재환 작가가 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상상해 본다. 쓰레기들을 주어 담아 콜라주 하며 낄낄거리고 즐거워했을 그의 장난스런 얼굴이 그려진다. 친구의 선물을 받아 들고는 크게 웃었을 회갑잔치 주인공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도 따라 웃는다. 작가의 유쾌한 칼날에 허를 찔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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